고성기 시집 '시인의 얼굴'
♧ 시인의 얼굴
시인의 얼굴엔 바람이 일어야 한다.
언 땅을 뚫고 솟아나는 들풀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콩밭 매는 할머니 주름살에 다가섰다가 뒤돌아서서 여의도 무딘 낯가죽을 찢는 칼바람이 되어야 한다.
늙은 솔
속 깊은 각질
향 깊은 이유 내 알겠다.
♧ 낙엽을 쓸며
애욕의 끈까지 놓으면
깃털보다 가벼워질까
썩어서 기다림도 죄가 되는 가을 앞에서
낙엽은
와르르 지고
비움 또한 떨어지고
바람은 흔들릴 때만
빗방울을 그립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무게가 있다
할 일을
다 한 뒷모습
암각화로 남아야 한다
♧ 늙은 솔 아래 누우면
늙은 솔 아래 누우면
바람도 강처럼 흐른다
아버지 젊은 시절 얼마나 흔들렸으면
저토록
가슴 갈라져
나이테 굵은 것일까
오늘은 실습처럼
바람 앞에 곧추 선다
아무리 버티어도 흔들리며 지는 잎
그렇다
긴 뿌리였다
울더라도 이기는 힘
♧ 창(窓)
마음이 좁다보니
작은 창(窓)도 성에 차다
그나마 매일 닦아야
볕들고 질 터인데
게으름
살까지 붙어
더디고 흐려지고
그 좁은 창으로도
그인 왜 찾아와서
똑
똑
똑
낙엽 지고
뚝 뚝 뚝
눈물지게 하는지
오늘은
산까지 들이밀며
닦아라 창
열어라 창
♧ 어떤 농부
모처럼 잔칫집 간다
옥색 저고리 고쳐 입고
대문 열다 눈에 밟힌
텃밭의 잡초를 뽑다
울 엄닌
손톱에서도
파랗게 싹이 난다
♧ 아내의 가을 1
Y신협 월례 행사
숲길 걷기 함께 가다
산탈 따서 깨물어보고, 억새 꺾어 배시시 웃고,
발간 단풍 아래선 철모른 소녀로 촐랑대며 앞서간다
난 멀리 뒤에서 지켜보며 안으로 웃고 있다
무엇을 주웠는지 돌아보며 손 흔든다
그건 분명 파란 가을이었다
부부란
먼 길 가다 돌아보며
손 흔들어 주는 것
♧ 아내의 가을 2
만원이란다, 황국(黃菊) 세 분(盆)
아내가 부려 논 가을
압구정 현대아파트 껌 값도 안되겠지만
온 마루
채우다 남아
침실까지 스민 국향
세 아이 학비 보낸 후
얇은 통장 앞에 놓고
막내 정장(正裝) 입혀야 면접 준비한다면서
이 달도
마이너스라고
죄지은 듯 웃는 아내
아내여, 제비 되어 강남이나 갈 일이지
한겨울 반소매 입고 우아하게 날 것이지
무거운
가을을 들고
4층까지 걸어왔느냐
*고성기 시집 ‘시인의 얼굴’(북하우스, 2016.)에서
사진 : 가을 느낌의 나무들
1. 참느릅나무 2. 담쟁이덩굴 3. 팽나무 4. 상수리나무 5. 단풍나무
6. 산딸나무 7. 느티나무 8. 팥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