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고성기 시집 '시인의 얼굴'

김창집 2016. 10. 27. 23:10


시인의 얼굴

 

시인의 얼굴엔 바람이 일어야 한다.

 

언 땅을 뚫고 솟아나는 들풀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콩밭 매는 할머니 주름살에 다가섰다가 뒤돌아서서 여의도 무딘 낯가죽을 찢는 칼바람이 되어야 한다.

 

늙은 솔

속 깊은 각질

향 깊은 이유 내 알겠다.

 

    

 

낙엽을 쓸며

 

애욕의 끈까지 놓으면

깃털보다 가벼워질까

썩어서 기다림도 죄가 되는 가을 앞에서

낙엽은

와르르 지고

비움 또한 떨어지고

 

바람은 흔들릴 때만

빗방울을 그립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무게가 있다

할 일을

다 한 뒷모습

암각화로 남아야 한다

    

  

늙은 솔 아래 누우면

 

늙은 솔 아래 누우면

바람도 강처럼 흐른다

아버지 젊은 시절 얼마나 흔들렸으면

저토록

가슴 갈라져

나이테 굵은 것일까

 

오늘은 실습처럼

바람 앞에 곧추 선다

아무리 버티어도 흔들리며 지는 잎

그렇다

긴 뿌리였다

울더라도 이기는 힘

    

 

 

()

 

마음이 좁다보니

작은 창()도 성에 차다

 

그나마 매일 닦아야

볕들고 질 터인데

 

게으름

살까지 붙어

더디고 흐려지고

 

그 좁은 창으로도

그인 왜 찾아와서

낙엽 지고

뚝 뚝 뚝

눈물지게 하는지

 

오늘은

산까지 들이밀며

닦아라 창

열어라 창

        

 

어떤 농부

 

모처럼 잔칫집 간다

옥색 저고리 고쳐 입고

 

대문 열다 눈에 밟힌

텃밭의 잡초를 뽑다

 

울 엄닌

손톱에서도

파랗게 싹이 난다

    

  

아내의 가을 1

 

Y신협 월례 행사

숲길 걷기 함께 가다

 

산탈 따서 깨물어보고, 억새 꺾어 배시시 웃고,

발간 단풍 아래선 철모른 소녀로 촐랑대며 앞서간다

난 멀리 뒤에서 지켜보며 안으로 웃고 있다

무엇을 주웠는지 돌아보며 손 흔든다

그건 분명 파란 가을이었다

 

부부란

먼 길 가다 돌아보며

손 흔들어 주는 것

    

 

 

아내의 가을 2

 

만원이란다, 황국(黃菊) 세 분()

아내가 부려 논 가을

 

압구정 현대아파트 껌 값도 안되겠지만

 

온 마루

채우다 남아

침실까지 스민 국향

 

 

세 아이 학비 보낸 후

얇은 통장 앞에 놓고

막내 정장(正裝) 입혀야 면접 준비한다면서

이 달도

마이너스라고

죄지은 듯 웃는 아내

 

 

아내여, 제비 되어 강남이나 갈 일이지

한겨울 반소매 입고 우아하게 날 것이지

무거운

가을을 들고

4층까지 걸어왔느냐

 

 

*고성기 시집 시인의 얼굴’(북하우스, 2016.)에서

   사진 : 가을 느낌의 나무들

   1. 참느릅나무  2. 담쟁이덩굴   3. 팽나무     4. 상수리나무   5. 단풍나무

   6. 산딸나무     7. 느티나무      8. 팥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