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우리詩' 11월호의 시들

김창집 2016. 11. 16. 09:25


못 자국 - 유진

 

 구옥을 수리하다보니 기둥에도 벽에도 못 자국투성이다

 

 내걸 것이 많아 못을 박았을 테고

 내걸 것이 없거나 잘못 박힌 못을 빼낸 것일 텐데

 못 구멍들만 흉한 자국으로 남았다

 

  기둥의 못 구멍에는 이쑤시개를 끼워 넣고 평면과 맞게 잘라내고, 벽에는 돌돌 말은 휴지의 송곳모양 반대쪽을 구멍의 깊이만큼 밀어 넣고 안쪽으로 오므려 문지르고 색을 입혔다

  얼핏 눈가림일 뿐 말끔히 지울 수가 없다

 

 상처 많은 나, 누군가에게 상처가 됐을지도 모를 지난날

 예리한 송곳에 찔린 듯 소름이 돋는다

 

 내세울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는 생,

 서로가 못을 박고 서로에게 못 박히는 생의 파편들

 자국이란 자국은 모두 상처인 것 같다

 

 못 박지 않고 살아야겠다.

    

 

 

버려진 트럭 - 채들

 

호박 덩굴이 손을 들고

트럭에 올라탔다.

 

개구리 울음강을 건너

들끓은 매미 울음바다를 가로질러

풀벌레 노래숲까지

얼마나 쉬지 않고

밤낮으로 달렸던지

 

늦가을 트럭에

익은 보름달들이

둥실둥실 한가득이다.

    

 

 

가을 어름 - 이미숙

 

 하늘이 너무 파래 눈물이 난다며 늦매미가 지잉징거리고

 

 식탁 위 산국山菊은 오지그릇 속에서 더딘 향기로 말을 걸어오고

 

 약혼 시절 떠올리나, 무릎 삐걱이는 평상의 노인들 막걸리 한 사발에 불콰해지고

 

 여름 몰리듯 한 생 살다 보면 박수 받을 이별도 있을 거라며 풀밭에서 목청 높이는 귀뚜라미들

 

 도신도신 아들과 이야기하며 모퉁이를 돌아가는 어머니는 힘찬 소 한 마리를 몰고 가는 것처럼 흐뭇해하고

 

 들판에는 욜그랑살그랑 곡식 여무는 소리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에요, 나는 정말, 어떤 노래로 이 가을의 귀를 터서 안으로 들어가야 할까요?

    

 

 

시 쓰기 - 이철경

 

채 마르지 않은 시멘트의 작은 공간

온라인 생명선을 통해 치열하게 잉태하던 시가

하이테크와 가상 공간의 어느 한쪽 귀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점점 순수 영혼과 시 쓰기가 더 이상의 존재 가치를

상실한 하나의 허기점이라 할지라도

행복합니다

 

모니터를 끄면 치열한 글쓰기의 잔상이

눈에서 가슴으로 스며들어 작은 파장을 몰고 와

향기를 발산하니

그 아름다운 여운에 숨을 쉽니다

    

 

 

앗싸 가오리 - 김송포

 

유리창과 유리창 너머를 돈다

일 층부터 칠 층까지 수족관을 헤집으며 그를 찾는다

하얀 뱃가죽은 절벽처럼 아슬한 공중을 넘어간다

앗싸 가오리 외치며 웃어넘기던 와인 잔의 땡그랑 소리,

가슴으로 오래 남을 여행자처럼 그의 행보는 예측 불가다

그동안 머문 기억들에서

잠시 풀어주면 세상 밖으로 나가 얼마나 버틸지

비슷한 동무를 찾고 노래도 부르고

일탈 이탈 자유를 주자고요

물 없이 살아보라지

새 없이 웃어보라지

슬픔의 세레나데 불러보라지

오사카 성 밖에서 묻는다

앗싸 가오리는 어디 계신가요

평생 못 볼 쇼를 보게 해 준 가오리와 저녁을 함께 할까요

가오리를 품을 수 없는 하얀 당신과

바닷속을 헤엄쳐야 하나요

오늘 밤, 앗싸 가오리! 한 잔 어때요

    

 

 

어머니 - 박동남

 

눈부신 사랑의 꽃을 피우고

황금빛 열매를 남기고 지다

        

 

전봇대의 혀 - 마선숙

 

이 가을에 실종된 사람들

전봇대에 숨어있다

부착방지용 뾰족이 틈새로

낡은 가발처럼 달라 붙어있다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호소는

속치마처럼 펄럭이고

유괴된 아이를 찾는다는 울먹임은

쇠창살처럼 먹먹하다

돈 빌려준다는 신용대출 전단지는

혀 빼물고 사람 유혹하고

스포츠센터 다이어트 광고는

여자들 계모임처럼 아양 떨며 왁자지껄하다

자살클럽 안내는 가면무도회처럼 은근하고

당신은 행복합니까 하고 묻는 수련원 포스터는

도둑맞은 답안지처럼 허탈하다

예쁜 아가씨 넘친다는 대양나이트 클럽 광고는

한 귀퉁이가 찢어져 대야 나이트로 땅에 떨어져 밟힌다

전봇대는 혀가 길다

나를 분실했으니 찾아주면 후사함이란 스토리까지 달고

숨이 차 쿨럭이지만

북새통들을 낙엽처럼 떨구지 않고

땅에 떨어진 전단지까지

묵묵히 몸에 휘감은 채

희망의 신문고를 울린다    


 

 

부채 - 홍해리


한평생

바람만 피웠다


여름내 무더위에

몸뚱어리 흔들어쌓다.


살은 다 찢겨나가고

뼈만 남아,        


초라한 몰골,

아궁일 바라보고 있다.



                 * '우리詩' 11월호(통권 341호)에서

                    사진 : 내장산의 단풍(2016.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