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업의 가을 시편
소설小雪을 하루 앞둔 오늘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올해는 이상하게 가을 비 내리는 날이
너무 잦다.
아침을 먹고 앉아
원고를 쓰려니, 처량한 생각이 들어
권경업 시집을 펴들었다.
작가가 산을 좋아해서인지
시집 속에 감성적인 시어들이 많이 들어있다.
여러 가지 생각지도 못한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시집도 많이 낸 부산 시인이다.
2011년 4월에는 ‘세상 가장 낮은 히말라야 원정대’를 결성하여
에베레스트의 길목 체불릉에 한국자선병원 ‘히말라야토토하얀병원’을 냈고,
2015년 10월에는 라오스 생쾅주 산골오지에
‘여민락 자선모자병원’을 세웠다.
다음 불로그 ‘권경업[바람의 시편들]에 가면
시의 ‘무한 인용을 허용’하고 있어
마음껏 퍼다 올릴 수 있어 좋다.
♧ 벽송사碧松寺를 향해
바람은 슬프다, 머물 곳을 찾지 못한
골골의 잎이란 잎 다 흔들고 온
쑥밭재 잿마루의 가을바람은 슬프다
은둔隱遁의 때가 이르렀다지만
숨을 데라곤 전혀 없는, 푸른 하늘에
풍덩, 몸이라도 던지고 싶으냐
키를 높이려다 등만 굽은 굴참나무
잊지 않겠다고, 변하지 않겠다고
아픔을 참아내며
맹세를 새겨 넣던 사랑의 칼금 앞에서
질기고 단단했던 회갈색 마른 수피樹皮가 터질 때
시인 이상이 까마귀의 검은 눈동자로 바라본
아래 평촌리는 지금 평면의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만남이 필연이었다면 이별이 우연이 아닌 세상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너를 따라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가시를 품고, 마른 갈잎들이
가랑가랑, 목이 쉰 손짓도 접고
지금 하나둘 물고기가 되어
이별의 몸짓으로 길을 나선다
출렁이던 능선은 파고波高의 정점에서 굳어버렸고
아무도 산 너머의 새벽을 알지 못하기에
바람이여! 어둠이 내릴 때부터 별이 질 때까지
침묵했던 산정山頂 위의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좌표座標,
북극성의 별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한有限한 시간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은 오직
마음속의 좌표일 뿐
진로를 수정하라, 북북서
언어와 생각의 형식이 다르다 할지라도
너 낭랑한 솔향기로 노래할 벽송사 터를 잡은
그 푸를 피안彼岸으로
♧ 가을 섬진강
지친 여정旅情에도 단풍빛
꽃물처럼 휘감은 화개천을 만나, 밤새
몸 섞어 뒤척이며 몸 섞어 하나 된 물길 5백리
인정스러운 마을만 휘돌아온 잔잔한 미소만 있습니다
떨던 피아골 골 깊은 두려움은 없습니다, 이제
지리산 마루 하늘의 모습으로
벌건 황톳물 갈앉혀, 아래로 아래로
정성스레 키워낸 재첩알들로, 언제나
남도南道의 정 뽀얗게 나누려는
광양 억양의 하동사람과
하동 말투의 광양 사람만 있습니다
앞앞이 말 못한 쓰린 속은 없습니다
형제봉 마루 매일 밤하늘 이울 때
새벽강물 긷던 손으로 소리쳐, 건너편
친정 아비의 안부를 묻던 백발이 되었을 악양 새댁과
아랫도리 벗어 머리에 이고, 둥둥
허기진 한낮을 맨살로 건너
다압多鴨 외가外家로 가던 작인作人의 어린놈들
아마 반백半白의 추억에 잠기게 할
저무는 가을강만 있습니다, 금빛 모래톱
배고파 따라오던 서러운 발자국은 없습니다
가물어 마른 몸에
품기에도 버거운 왕시루봉과 백운산이지만
회남재 넘어 쫒던 이, 쫒기던 이, 다를 것 없이
속으로, 속으로만 골골거리며 삭히던
아픔도 분노도 백골처럼 다 사그라졌다며
이제는 그냥가자, 바다로 가자고
뱃살에 기름 올라 펄떡일 전어錢魚 떼
남은 이빨 몇 없어도 고소할, 바다로 가자고
말없이 소매를 잡아끌며, 쉬엄쉬엄
굽 돌아 흐르는 가을, 늙은 섬진강만 있습니다
♧ 흔들리는 갈대의, 길에게 띄우는 편지
이제 와서 되돌아 설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너와 나는 두려움의 강 앞에 서 있다
돌아가자니 온 길이 수고스러웠고, 나아가자니
강은 깊어 헤어날지가 의문이다
설령 건넜다 하더라도 상강霜降을 며칠 앞둔
젖은 몸과 마음에 하얀 겨울만 매섭게 기다릴 뿐
뼛속까지 아릴 그 추위를 차마 견딜 수 있겠느냐
내가 너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너를 무시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저 강변의 흔들리는 갈대처럼, 어쩌지 못해
밤새 서걱서걱, 제 속을 비워가며 울고 있을 뿐
여기까지 함께 한 너와의 길에
때로는 부르트고 때로는 갈라지던 그 발과 종아리를
강물에 담그고 서 있어보지만
너와 함께 건널 수 있는, 아니
건너서는 안 될 강임을 나는 안다
♧ 단풍, 무서리에 젖은 가슴은 시려
나는 안다, 조금은 낡은 듯한
작은 스케치북 앙가슴 곱게
아직도 수채화를 그려가는 이를
장당골 빈 바람에
내어 말리는 마르지 않은 물감
무서리에 젖은 가슴은 시려
밤마다, 발갛게 제 몸을 태우는
♧ 가을 산행
세상살이 마흔이 넘으면
가끔은 까닭 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떠나는 가을 앞에선 더욱
예전에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고추잠자리 한둘씩 사라지고
모두 제 갈 길로 바삐 가버리면
왠지 모를 설움은
그냥 그러려니 서 있을 수 없게 한다
여름날의 땀방울 거두어간
빈 들녘의 언저리
흔들리는 계절의 창백한 억새밭에서
자꾸 빨리 떠나라며 보채는 바람에
나는 등 떠밀리며 실컷 울고 있었다
♧ 차마, 차마 나누지 못했던 말들이
쑥밭재 가을 잿마루에 귀를 대면
총총, 떠나보낸 젊은 날이 저만치
아름다운 날들이 저만치
조개골 은빛 눈방울로 구르던 사랑아
이제는, 갈꽃 흐드러진 하구河口 어디쯤
지친 다리쉼 할 사람아
느릅나무 빈 가지를 흔드는
너의 순결 같은 바람에게서
차마, 차마 나누지 못했던 말들이
파랗게 묻어나오고
나는 종일 이명耳鳴에 귀를 앓는다
*권경업 지리산 시편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작가마을, 2012.)에서
사진 : 광령천 계곡의 가을빛(2016.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