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자 시인의 나무시편
♧ 나무의 표정
아침해가 둥실 산을 껴안았을 때
나무는 더 솟구치고 싶어
젖은 나래를 펄럭거린다
더 높은 가지에서 이음새 없는 덤불 속을
통통거리며 햇살을 이녘으로 당기는 눈짓들
잎새들은 제각기 톱니 같은 페달을 밟고
뿌리는 비어 있으나
줄기들은 허방다리를 짚었을까.
나무가 반목하여 바라보는 산마루 닫힌 곳
그것은
구름 속에 떠있고 잡목숲 샛길일 수 있다
4월의 종다리처럼
가볍게 솟아오르며
매일 발꿈치 들어 올리는 나무 나무들…
♧ 나무들의 흰 뼈
영하의 아침 호수의 산책길에서
호면에 비추이는 나무들의 흰 뼈를 만났다.
비틀거리며 흔들거리며 구비 구비 나무가 밟아온
아픔의 자국을 똑똑하게 바라보았다
돌아보면 아쉬움도 그리움도 털어버린 앙상한
솔바람…
새들도 둥지를 틀지 못하는 뾰족한 갈증
호숫가를 어슬렁거리는 그들 옹이 속에서
반짝 빛나는 나무의 눈물방울을 보았다
겨울나무들 흰 뼈의 조용한 신열을 짚어보았다
♧ 나무의 기침 소리
홀로된 나무는
생에서 받은 상처로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늦은녘 빈 손 빈 몸입니다
추운 혼은 절뚝이며 걸어갑니다
찰라가 영겁으로 타오르는 적막이
발가락 사이사이 물집으로 맺혔습니다
생명을 태워서 만드는 빛
다비의 불꽃 속에서
겨우 한 마디의 말을 찾아 낼 수 있을까요?
정갈하고 고요하고 하얀 눈길 위에
사리 같은 말 한 마디!
한 마디 별 같은 말을 찾아서 나무는
머나먼 길을 비틀거리며 걷고 있습니다
나무의 정강이 위에
피멍 하나 꽃망울처럼 솟아
나무가 기침하는 소리 깊은 밤에도
가슴에 파문 짓고 있습니다
♧ 집 없는 나무
내 가슴속 빈터에는
집 없이 떠도는 나무 한 그루 흐르고 있다
구비구비 아픔의 길 맨발로 건너오며
누구와도 가난을 비교하지 않았다
비 안개 구름 덮인 여름 들이나
겨울 광야를 울면서 쏘다녔지만
나무는 가끔 잎새를 흔들어
위무의 그림자를 내 가슴에 심어주었다
내 마음 빈터에는
홀로 울면서 흔들리는
집 없는 나무 한 그루 사느니…
♧ 아픈 나무들
흰 구름도 팝콘처럼 흩어지는 5월 아침
DMZ의 총총한 나무들은 빠른 걸음으로
155마일 사선을 허둥지둥 건너가더라
발꿈치 살짝 들고
나무들 행진을 사뿐히 넘겨다보면
지난 밤 터무니없이 맺힌
눈물방울들이 달그락 달그락
만신창이의 꽁무니를 뒤따르고 있어…
이념의 경계를 지우고
유년의 반딧불이 반짝이는
둥근 길을 돌고 돌아
아픈 날개를 접은 나무들은
생솔가지 타는 옛 뜨락에
주검보다 무거운 겨울옷을
캄캄하게 풀어 놓는다
♧ DMZ 근처의 나무들
조심조심 발꿈치 들고 DMZ 근처로 건너가는 나무들…
밤이 으슥해지자 나무들의 호흡이 점차 빨라진다
62년 침묵의 늪쪽으로 계속 페달을 밟고 가는 겨울나무들
모멸의 아픔을 딛고 눈물의 강을 맨발로 건너…
248km 빈 벌을 가로 질러 가는 나무들
자유의 마을 S지점까지 첫눈이 오기 전에 닿아야 한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불똥이 설봉 아래 호외를 던지고 갈 때
반달가슴곰이 뒤따라 한 마리 외눈 뜨고 지나간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까지 도보로 가다가 보면
낡은 철모 하나 탱탱한 시간 밑에 깜빡깜빡 삭아 내리네
그대 영혼 죽어서도 절규하는 스물한 살
코리아의 새내기 국군장병…
후미진 이 강토 DMZ 억새 숲에
피의 향기 번지어 젊은 혼을 울고 가는 멧새들…
여기는 하늘 아래 이색지대 DMZ
철새들이 100개의 백열등 같은 눈을 뜨고
천상의 운율을 감지하며 꽃가지 아래서
<철새 포럼>을 열고 있나니
사선을 넘어 DMZ 길 떠나는 나무들
그들의 호흡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 가을 대관령
해발 832m
대관령의 가을을 땀으로 밀고 오르자면
시간에 상처 입은 나무들이 가로세로 흔들리며
하늘계곡을 혈점 찍으며 내려오더라
아흔아홉구비 대관령 단풍나무 신갈나무
오리나무들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릴 즈음
사향노루 한 마리
사스레나무숲에 주둥이를 숨겼지
방향 바꾸어 상원사 계곡 구룡폭포 쪽으로
오르다가 선 듯 뒤돌아보게나
산천어 금강모치들이
은빛 지느러미로 점핑하는 저 묘기 좀 보라!
단풍나무들이 기우뚱 기우뚱
우우우우 소리치며 춤을 추며 내려오는 계곡
피카소보다 어려운 그림 한 장 빈 가지에
걸어두고 어디론가 흩어지는 잎새들…
외눈박이 가을풍경 한 장만
덜컹 거리더라
리듬으로 나부끼는 가을 대관령
가파른 생의 음계 꼭대기에…
♧ 가을 나무의 유희
마지막 계절 어귀에 홀로 서서
둥근 생을 돌아보는 가을 나무
절뚝이며 절뚝이며 구절양장 머나먼 길
인연의 끈 이제는 조용히 놓아 버리자고
고개를 살랑 흔드네
<모두가 헛것이다. 헛것이다.>
이쯤에서 끈 하나 놓아 버리자고…
때 묻은 짐보따리 저만치 던져두고
둥둥둥둥 처용처럼 춤이나 한판 추고 갈까
떨이다! 막판이다!
떠나면서 돌아보는 한줄 뜨거운 키스
붉은 잎새 하나만 가지 끝에 걸려 있네
생을 조용히 마감하는 나무의 춤사위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꽃처럼 피어오르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살아온 생의 프로그램을
가즈런히 잡고
계곡위에 S S S… 모르스 부호 같은 발자욱을 남기며
가을 나무의 유희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노을처럼 타고 있네
*‘산림문학’ 통권24호 ‘산림문학이 만난 문인 - 박명자’에서
사진 : 수악계곡 숲 풍경(2016. 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