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오승철 시인의 제주시편

김창집 2016. 11. 24. 11:51


오승철이란 이름이라 걸렸는지,

터무니 있다란 제목이어서 눈에 띄었는지,

손이 가 빼어낸 시조집,

사전에도 없는 제목이다.

  

하기사 터무니없는 일들을

터무니 있는 것으로 여기고

권력을 함부로 썼다고

끌어내리려는 사람들과 버티는 편의

대치형국으로 흘러가는

요즘 세상이 아닌가.

 

어제부터 제주에도 기온이 급강하 해서

한라산에 상고대가 끼었다는 뉴스를 듣으며

시조집에 담긴

제주의 문화와 역사를 새겨보는 아침이다.

     

 

고승사

 

가을 끝물 다랑쉬오름,

야고 몇은 남아서

갈라파고스처럼 팽귄처럼 오종종히 남아서

어느 절 법어작작을 반가좌로 듣는다

 

산불 감시 초소에 문패 올린 고승사

이름 끝에 ()’ 자 쓰면 일본에서 난 거라며

시주를 하지 않아도

건네 오는 유잣빛 하늘

 

아무렴, 이 사람아

우리가 왜 만났겠나

솔체꽃 하나만 져도 먹먹한 이승에서

우연히 세상의 번()을 함께 서려 왔잖은가

    

 

 

한가을

 

한여름과 한겨울 사이 한가을이 있다면

만 섬 햇살 갑마장길

바로 오늘쯤이리

잘 익은 따라비오름 물봉선 터뜨리는

 

고추잠자리 잔광마저 맑게 씻긴 그런 날

벌초며 추석명절 갓 넘긴 봉분 몇 채

무덤 속 갖고 가자던

그 말조차 흘리겠네

 

길 따라

말갈기 따라

청보라 섬잔대 따라

아직도 방생 못한 이 땅의 그리움 하나

섬억새 물결 없어도 숨비소리 터지겠네

 

    

 

가을이 어쨌기에

    -제주에서 발견된 닭의장풀과의 코멜리나 벵갈렌시스는 땅속에서도 꽃이 핀다. 어느 청년의 가슴에 필 것 같은

 

1

갈바람 긴 생각 끝에 휙 지는 고추잠자리

 

2

가을이 어쨌기에 화살기도 쏠 새도 없이

출근길 차를 돌려서 제주행 비행기 탔나

 

3

저녁마다 무심히 노을 내리는 하늘처럼

어머닌 또 그렇게 세상을 내린 것인데

모슬포 자리젓 냄새 가시 박힌 그리움

 

4

한라산이 낳은 오름,

그 오름이 낳은 봉분

생전에 못 안아본 어머니 오늘 문득 안고 싶었는지

뚜우 뚜 휴대폰 신호음

저 세상으로 날리던 사내

 

5

지상에 피어야만 꽃이라 이르느냐

꽃아, 수평선을 퍼렇게 오므린 꽃아, 꽃아, 내 안의 마그마 같은 꽃아,

저 혼자 견디다 못해 땅속에서 터진 꽃아

화산섬 가슴에 묻은

코멜리나 벵갈렌시스!

 

    

 

그리운 남영호*

    -삼백스물세 분을 호명하며

 

바다는 싸락눈을 삼키는가 내뱉는가

수평선 넘나들던

섶섬 새섬 문섬 범섬

저무는 바다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숨바꼭질 끝났다

이제 그만 나와라

경술년 그 뱃길이 황망히 놓친 세상

못 다한 마지막 말이 별빛으로 돋아난다

 

보따리장수 홀어머니 바다에 묻은 세 아이

그 눈빛 그 어깨울음 뿔뿔이 흩어진 골목

마당귀 유자 몇 알이 장대만큼 솟았는데

 

, 어느 이름인들

눈부처가 아니랴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못했어도

내 아직 이승에 있을 때 이제 그만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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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침몰한 <제주-부산> 정기여객선

        

 

 

윤동지 영감당

   -관음사로 옮겨지던 안동의 관세음보살상이 풍랑으로 배가 침몰하자, 윤씨 할아버지의 낚시에 걸렸다는데


거기, 거기

함덕 조천, 마을 하나 또 건너

돌담 따라 술래처럼 서너 굽이 돌아들면

올레길 꿩마농꽃도

먼저와 비는

거기


이 뭐꼬

돌부처야, 안동부처 체면이 있지

하필 윤동지 영감옹 낚시에나 걸렸느껴

척 보면 손바닥 안이지, 눌 만나러 왔느껴


절 받고 제물 받는 일 그것마저 지루해지면

사람팔자 부처팔자 다 터놓는 이 봄날

그 이름 그 허기만은

토해내질 못하겠네

 

    

 

돗 잡는 날

 

때 아닌 왕벚꽃이 펏들대는 겨울이었다

똥돼지 목 매달기

딱 좋은 굵은 가지

꽤애액

청첩을 하듯

온 동네를 흔든다

 

잔치,

가문잔치

그 아시날 돗 잡는 날

자배봉 앞자락에 가마솥 내걸리고

피 냄새 돌기도 전에 터를 잡는 까마귀 떼

 

솥뚜껑 베옥 열고

익어신가 한 점 설어신가 한 점*

4 · 3동이 내 누이 시집가던 그날처럼

한 양푼

서러운 몸국

걸신 들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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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속담에서 차용.

 

 

오승철 시조집 터무니 있다’(푸른사상, 2015.)에서

       사진 : 어제 오후 집앞 소공원에서 본 늦가을의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