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섣달 중순에 띄우는 편지

김창집 2016. 12. 13. 09:00


12월이 되면서부터

송년회에서 사람을 만나는 게 주된 일과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생각했던 일이

잠자리에 들면서 돌이켜보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있기도 한다.

 

그래 산다는 것이

그때그때 의미를 두고 행하는 일만이 아님을

이제 와서 깨닫기도 하고,

 

어떤 날은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진 일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기도 하고

가슴이 뿌듯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친구들이여!

할 일을 다 못했다고 서두르지도 말고

무엇 하나 이루지 못했다고 한탄하지도 말자.

 

비록 큰 업적을 남기진 못할지라도

오늘 내가 하는 일들이

누군가에게 조금은 위안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만 가지고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 식나무 열매가

한겨울 굶주린 새들에게

양식을 제공하며 뜻을 이루는 걸 보면서.

   


뗏목 - 신경림

 

뗏목은 강을 건널 때나 필요하지

강을 다 건너고도

뗏목을 떠메고 가는 미친놈이 어데 있느냐고.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빌어

명진 스님이 하던 말이다.

저녁 내내 장작불을 지펴 펄펄 끓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절 방

문을 열어 는개로 뽀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곰곰 생각해 본다.

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지지 않겠다고

밤낮으로 바둥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나 지금 뗏목으로 버려져야 할 것들을 떠메고

땀 뻘뻘 흘리며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닥 - 정호승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겨울 편지 - 안도현

 

당신.

저 강을 건너가야 한다면

, 얼음장이 되어 엎드리지요

 

얼음장 속에 물고기의 길이 뜨겁게 흐르는 것처럼

내 마음속에는 당신이 출렁이고 있으니까요

   

 

 

흔적 - 정희성

 

어머니가 떠난 자리에

어머니가 벗어놓은 그림자만 남아있다

저승으로 거처를 옮기신 지 2년인데

서울특별시 강서구청장이 보낸

체납 주민세 납부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화곡동 어디 자식들 몰래 살아 계신가 싶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 도종환

 

이 세상이 쓸쓸하여 들판에 꽃이 핍니다

하늘도 허전하여 허공에 새들을 날립니다

이 세상이 쓸쓸하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유리창에 썼다간 지우고

허전하고 허전하여 뜰에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산다는 게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어서

파도는 그치지 않고 제 몸을 몰아다가 바위에 던지고

천 권의 책을 읽어도 쓸쓸한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글 한 줄을 씁니다

사람들도 쓸쓸하고 쓸쓸하여 사랑을 하고

이 세상 가득 그대를 향해 눈이 내립니다

   

  

 

낮술 - 문병란

 

아무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는 날

아무 일도 하고 싶은 일이 없는 날

나는 혼자서 낮술을 마신다.

 

꽃마저 피다가 심심해서

제 흥에 취해 하르르 시드는 날

꽃 사이 몰래 숨어 잠든 바람아

너마저 이파리 한 잎 흔들 힘이 없니?

 

어디선가 산꿩이 길게 울고

햇살 눈부시어 사무치는 날

혼자서 사랑하다 혼자서 미치는

그리움보다 먼저 취하는 고독을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