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 고은영의 겨울시편
♧ 겨울의 플라타너스
그의 겨울은 에움길에 거친 한인가
그는 끈질기게 생을 애착하여
자신의 껍데기를 찢어발기는 아픔도 사랑이려니
냉기 가득한 왜바람에
마른 잎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혈기로
미련을 떨고 있다
봄이면 둔하디 둔한 눈을 부스스 뜨고
가장 늦게 새 순을 틔우는
수세기에 걸쳐 오로지 잃어버린
사랑 하나 굽이치는 사계를 만나
그 뜨겁던 성욕을 발산하던 여름과
빙하에 갇힌 까칠한 잎들이 겨울의 한파에
바르르 떨며 동파 돼가는 밤의 욕정 위에
하잔한 영혼으로 매달린 울음
황홀한 숨결처럼 젖어드는
겨울의 고독과 추위에 맛문하는 매듭달
그는 공황이 깊어진 도심의 축대로 서서
새우잠을 자고 마른 잎을 버리지 못한 노고에
가장 아픈 고통을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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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움길 : 굽은 길.
하잔하다 : 공허한 느낌 또는 무엇을 잃은 듯 공허한 느낌이 있다.
맛문하다 : 몹시 지친 상태에 있다.
매듭달 : 12월.
왜 바람 : 이리저리 방향 없이 막 부는 바람.
♧ 첫눈 오는 날은 운명 같은 사랑 하나 만나고 파라
무량한 그리움을 담아가는 마른 가슴에
첫눈이 내리면
내 영혼의 첫 갈피에
겨울이 맨몸으로 하얗게 웃고
첫눈과 더불어 어느 강변 조그만 카페에 앉아
향긋한 커피 한 잔의 풍경은 시리도록 행복하다
신들의 외면한 뜨락
제물로 바쳐진 안드로메다여
그대처럼 나는 세상의 허물
또는 세인들의 가슴에서 잊혀간
어느 초라한 신작로에서
전설 같은 남자 하나 만나고 파라
푸조나무처럼 오랜 시간
멍울로 엉긴 목을 빼고 기다린
내 영혼의 어두운 골목
페르세우스가 성큼 당도하면
예감하는 빛살 위로 첫눈은 소복이 쌓이고
우리 비밀 한 사랑은 겨우내 꽁꽁 언 바람을 녹이고
살가운 강물로 흐르는……
첫눈 오는 날은 운명 같은 사내 하나 만나고파라
운명 같은 사랑 하나 만나고파라
♧ 동백꽃 연가
갈매 빛 우듬지에 겨울 건반을 두들기던 바람이
사분사분해진 새 녘에
성산읍 산간에 유독 붉은 정 염을 즈려밟고
동백의 핏빛 얼굴을 수탈하는 서설에
동박새가 뜨겁게 질투하며 아침을 찢어발겼다
자지러진다 동박새
누군가 죄의 명분도 없이 내리치는 단 두 대
댕강댕강 잘려나가는 저 동백의 얼굴
흰 눈 위에 낭자한 선홍색 핏자국
본디 사랑을 지키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다
서럽디 서러운 완벽한 색의 조화
침묵과 주검에 기화되는 실어증
그 푸른빛 향이 창공에 시리다
♧ 눈의 나라
흰 추위가 닥쳤다
느티나무 마른 잎새에 소복이 설화가 피고
고립이라는 말들이 무수히 창공에서
포슬 눈이 되어 하루 종일 하염없이 내린다
겨울이 깊어진 자락에서
사람들은 싸리비로 눈을 쓸고
나는 똥개 마냥 설레는 가슴으로
창가에서 내내 어쩔 줄 모르다
가난한 온정의 들창으로
해 떨어지는 곳을 향하여
가슴에 따듯한 촛불을 밝히고
언 몸 녹이는 남루한 창가
까마득한 신화를 읽어가는 지금은
커피가 식어가고
어두워지면서 대지는 가슴을 닫고
하늘은 하얀 문패 하나 내어 걸었다
“설국”
♧ 겨울의 그리움
방황하는 이들이여
눈이 내리면 눈송이와 춤을 추는 그리움이
긴 꼬리로 펄럭이는 영혼의 하얀 샛길에서
저물어가는 한 해를 그래도 감사하여라
쓸쓸한 간이역처럼 익숙한 외로움도 고이 접어
겨울 강변에 나가 지난 세월을 종이배로 띄워라
춥디추운 한기로부터 저 거룩한 곳에 이르기까지
그리움도 고요한 촛불을 켜야 한다
이 겨울의 페이지에서
왜소한 존재를 피력하고
그대의 내면에 깊숙이 들어가 노를 젓고
고독과 더불어 떠돌던 상한 마음을 내려놓아라
평생 그대를 기다린 평화에 다다르면
거기에 그대가 그토록 소망하던
완전한 사랑과 천국이 숨 쉬고 있나니
겨울의 그리움은 한 자루의 촛불처럼 타오르는 일이다
♧ 송년에 기대어
어느 날부터 기도하는 법을 잊어 버렸다
게으른 결과만큼 후회만 앞서는 나는
자랑할 게 하나도 없구나
미래의 소박한 꿈을 설계를 한다거나
이제 나는 거대한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기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나는 아파했더냐
가중되던 고통 속의 기도야말로 얼마나 절실했더냐
욕망의 무게가 무겁거나 뜨거운 욕구일수록
굽이치는 아픔의 상처나 실망도 큰 것이다
어떤 욕구나 욕망도 이제 와 나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폐기돼야 할 허접한 부유물이고
살아오며 비워야 하는 욕된 허구임을 알았다
슬픔에도 내성이 생기고
내성에 점점 익숙해지면 무덤덤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포기하는 삶을 천천히 습득하는 것이다
고통이 됐건 행복이 됐건
인생이란 특별할 게 하나도 없이
어떤 형편에서 건 그저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그것이 세월이 내게 준 연륜이고 면류관이었다
그것이 현재 내 삶의 현주소이며
결과이고 결론인 것이다
묵직한 생의 애환들이 두텁게 쌓여도
나이를 먹을수록 생의 종점을 향하여
이제 조용히 걷고 싶은 것이다
절대 침묵으로 최상의 고요 속을 유영하고 싶은 것이다
♧ ‘소화 고은영 Gallery & Poem’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