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시인의 시와 박주가리
♧ 지는 꽃에게 묻다
지는 게 아쉽다고 꽃대궁에 매달리지 마라
고개 뚝뚝 꺾어 그냥 떨어지는 꽃도 있잖니
지지 않는 꽃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피어나
과거로 가는 길 그리 가까웁게 끌고 가나니
너와의 거리가 멀어 더욱 잘 보이는 것이냐
먼 별빛도 짜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이냐.
♧ 우리들의 말
거리를 가다 무심코 눈을 뜨면
문득 눈앞을 가로막는 산이 있다
머리칼 한 올 한 올에까지
검은 바람의 보이지 않는 손이
부끄러운 알몸의 시대
그 어둠을 가리우지 못하면서도
그 밝음을 비추이지 못하면서도
거지중천에서 날아오고 있다
한밤을 진땀으로 닦으며 새는
무력한 꿈의 오한과 패배
어깨에 무거운 죄 없는 죄의 무게
깨어 있어도 죽음의 평화와 폭력의 설움
눈뜨고 있어도 우리의 잠은 압박한다
물에 뜨고 바람이 불리우고
어둠에 묻히고 칼에 잘리는
나의 시대를
우리의 친화를
나의 외로움
우리의 무예함
한 치 앞 안개에도 가려지는 불빛
다 뚫고 달려갈 풀밭이 있다면
그 가슴속 그 아픔 속에서
첫사랑 같은 우리의 불길을
하늘 높이 올리며 살리라 한다.
♧ 가벼운 바람
사람아
사랑아
외로워야 사람이 된다 않더냐
괴로워야 사랑이 된다 않더냐
개미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얼음판 같은 세상으로
멀리 마실갔다 돌아오는 길
나를 방생하노니
먼지처럼 날아가라
해탈이다
밤안개 자분자분 사라지고 있는
섣달 열여드레 달을 배경으로
내 生의 무게가 싸늘해
나는 겨자씨만큼 가볍다.
♧ 황태의 꿈
아가리를 꿰어 무지막지하게 매달린 채
외로운 꿈을 꾸는 명태다, 나는
눈을 맞고 얼어 밤을 지새고
낮이면 칼바람에 몸을 말리며
상덕 하덕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만선의 꿈
지나온 긴긴 세월의 바닷길
출렁이는 파도로 행복했었나니
부디 쫄태는 되지 말리라
피도 눈물도 씻어버렸다
갈 길은 꿈에서도 보이지 않는
오늘밤도 북풍은 거세게 불어쳐
몸뚱어리는 꽁꽁 얼어야 한다
해가 뜨면
눈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샌 나의 꿈
갈갈이 찢어져 날아가리라
말라 가는 몸속에서
난바다 먼 파돗소리 한 켜 한 켜 사라지고
오늘도 찬 하늘 눈물 하나 반짝인다
바람 찰수록 정신 더욱 맑아지고
얼었다 녹았다 부드럽게 익어가리니
향기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
뜨거운 그대의 바다에서 내 몸을 해산하리라.
♧ 첫눈
하늘에서 누가 피리를 부는지
그 소리가락 따라
앞 뒷산이 무너지고
푸른빛 하늘까지 흔들면서
처음으로 처녀를 처리하고 있느니
캄캄한 목소리에 눌린 자들아
민주주의 같은 처녀의 하얀 눈물
그 설레이는 꽃이파리들이 모여
뼛속까지 하얀 꽃이 피었다
울음소리도 다 잠든
제일 곱고 고운 꽃밭 한가운데
텅 비어 있는 자리의 사내들아
가슴속 헐고 병든 마음 다 버리고
눈뜨고 눈먼 자들아
눈썹 위에 풀풀풀 내리는 꽃비 속에
젖빛 하늘 한 자락을 차게 안아라
빈 가슴을 스쳐 지나는 맑은 바람결
살아 생전의 모든 죄란 죄
다 모두어 날려 보내고
머릿결 곱게 날리면서
처음으로 노래라도 한 자락 불러라
사랑이여 사랑이여
홀로 혼자서 빛나는 너
온 세상을 무너뜨려서
거대한 빛
그 無地한 손으로
언뜻
우리를 하늘 위에 와 있게 하느니.
♧ 절정을 위하여
조선낫 날빛 같은 사랑도
풀잎 끝의 이슬일 뿐
절정에 달하기 전
이미 내려가는 길
풀섶에 떨어진 붉은 꽃잎, 꽃잎들
하릴없이 떨어져 누운 그 위에
노랑나비 혼자 앉아
하마하마 기다리고 있다
절망이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시인이여
슬픔도 눈물로 씻고 씻으면
수정 보석이 되고
상처도 꽃으로 벌어
깊을수록 향으로 피어오르는가
마음을 닦아 볼까
스스로 깊어지는 숲
속으로 들어가
흔적도 남기지 않는
바람을 만나네
무거운 마음 하나 머물고 있는
바위 속을 지나니
절정은 이미 기울어지고
풀 새 벌레 한 마리 들리지 않네
목숨 지닌 너에게나 나에게나
절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