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2016 겨울호의 시

김창집 2016. 12. 28. 09:36


제주작가통권 55호가 나왔다.

특집 중편소설 오경훈의 맹꽁아 너는 왜 울어전재,

고석범고시홍의 단편, 김성중의 엽편,

김이은의 동화, 김섬의 연재동화로 이어진다.

 

시조는 김연미 김정숙 김진숙 오영호 장영춘 한희정 홍경희,

시는 강봉수 김광렬 김문택 김병택 김수열 김승립 양순진

오광석 이윤승 이종형 차주일 허유미 현택훈,

기획탐방 홍임정, 인터뷰(현택훈 시인) 김세홍

기고 사이, 수필 문영택현기영

길 따라 떠나는 제주기행 김광렬

평론 고명철, 연재평론 장영주,

서평(고정국 난쟁이 휘파람소리’) 김정숙 등이 주 내용이다.

 

그 중 요즘 시국 분위기와 어울리는 시조와 시 몇 편을 골라

한겨울에도 그 빛을 잃지 않은 콩짜개덩굴과 같이 올린다.

 

 

 

유혈목이 - 김정숙

 

꽃반 귀퉁이에

허물 걸쳐

두었네

 

하얗게

사그라드는

한때의

비선(秘線)

 

새치 혀 날름거리던

꽃뱀 거기

있었네.

   

 

 

봉하마을 - 장영춘

 

세상은

가벼운 낙화

동백꽃 같은 것을

 

부질없다

부질없다

되뇌이며 가는 구름

 

절벽에

석화 한 송이

바보처럼 피었다

     

 

정답 찾기 - 강봉수

 

, 아니요로 답하세요

 

, 할 때 예 하고

아니요, 할 때 아니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나라가 정상적입니까?

잘못되었다면 바로 잡아야죠?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책임져야죠?

능력이 안 되면 물러서야죠?

 

하면 안 될 말인가요

야속하게 들리시겠죠

해답은 본인 스스로 찾길 바랍니다.

   

 

 

어둠의 시간 - 김광렬

 

수많은 고양이들의 손발을 묶으려다가

자기 발등을 찍은 고양이를 보았다

철퍼덕 하고 그 옆

도랑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똥이 튈까 두려운 도랑물들이

일제히 앞과 뒤 옆쪽으로 도망쳤다

잽싼 날개를 지닌 물방울 몇은

자기는 아닌 척 더 멀리 튀었지만

그래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수많은 고양이들이 경천동지할 일은

그들이 그렇게 믿던 교주고양이가

사실은 꼭두각시라는 점이었다

꼭두각시라는 말은

남의 조종을 받는 자를 말함이렷다

씨앗 뱉듯 주체성을 내던지고

자기철학도 없는 존재를 뜻함이렷다

수많은 고양이들은 왜 그 시절

분명하던 시력을 잃어버렸던 것일까

더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시력을 회복하려는 찰나,

이도 결국 흘러가고 말 것이라며

썩은 도랑물들은 여전히 엎치락뒤치락

숨바꼭질하며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수국 - 김수열

 

간밤 비바람이 심한 탓일가

사려니 길섶에 수국이 낭자하다

 

더러는 찢기고 더러는 꺾이고

아직 덜 여문 꽃망울

파리한 얼굴을 흙바닥에 묻었다

 

인기척에 놀란 노루가

때죽낭 사이로 총총총 사라진다

 

검은 까마귀 검게 울고

수국수국 수국꽃이 운다

 

나라가 걱정이다

나라가 걱정이다

     

 

아래로 쏟아지는 것들 - 양순진

 

누가 비 내린다고 하나

저게 비라니

누가 앞뒤 생각 없이 비 내린다고

사전에 교과서에 시집에 설교해 놓았나

 

저렇게 아래로

아래로만 쏟아지는 건 굴욕의 피

실컷 실토하지 못한 억울함의 호소

직선으로 사선으로 곡선으로 굴곡 만들며

풀어헤치는 하늘과 땅의 토론

아직도 매듭짓지 못하는

진정성과 기만의 결투

 

구토 같은 저게 비라니

단지 비라니

탄탄대로 승승장구하는 당신도

때로는 허수아비처럼 속이 비었다

소유와 맞붙은 한 판 승부에 열 올리며

무소유의 홀가분함 알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 알면서도

수많은 계약서에 사인(sign)하지

 

울분은 참지 못한 화가 아니라

희석하지 못한 관계 때문에

폭발하는 것

 

공중에서 숱하게 머뭇거리다

착지해야 할 정점 잊어버린 채

아래로 아래로만 쏟아지는

저 무색의 갈망들

뉴스 속에서 언론 속에서

개인주의가 빗나간 계획 속에서 부서지네

유리알처럼 깨어지네

저렇게 속수무책인

세기말 스캔들

누가 저 쓸쓸한 추락을 비라고 하나

   

 

 

빨간색 원고지 - 차주일

 

이 감방에 수감되면 모두 좌파가 되지

잠꼬대 동작까지 반역으로 읽히지

감방에 갇힌 몸은 발설된 적 없는 문자

멸균할수록 더 전염되는 체형이지

필기체로 꿈틀대는 맨몸을 운동권(運動圈)이라 하지

감방()에 갇혀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정신을 모으면[]

혁명가로 불리지

수형복은 체형 개조에 마침맞은 고딕체이지만

교정 줄로 옭아매고 독방에 처넣어도

맨몸은 쑥덕공론처럼 옮겨 다니지

끝내 만민을 물들이지

고문에 굴하지 않고 기꺼이 주검 되어 내지른

한 사람의 혀는 펜촉이지

광장에 모여 이구동성 하는 입술의 대열을 내려다 봐

수만 입술에 갇혀 요동치는 붉은 혀를 읽어 봐

혀가 꽂혀 있는 몸은 마르지 않는 만년필이지

감방 안에 가둘 수 없는 수배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