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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집 ‘사월 바다’

김창집 2017. 1. 18. 00:21


작가의 말

 

시골집에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거기 수련 한 포기가 살고 있습니다.

나는 수련에게 왜 더러운 진흙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진흙이야말로 존재의 바탕이요 수련의 현실이며 운명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왜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느냐고 묻습니다.

진흙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현실 아닐까요.

아비규환의 현실, 고통과 절규와 슬픔과 궁핍과 몸부림의 현실.

그 속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요.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을 찍으려면 몸에 흙이 묻습니다. 집을 고쳐 지으려면 흙먼지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지난 사년간 온몸에 흙을 묻히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이 시들을 썼습니다.

 

구도의 길과 세속의 길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행을 통해 가고자 하는 길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 201610월 도종환

    

 

모슬포

 

바람 몹시 불어 못살겠다고 못살포라 불렀어

대정에서 걸어서 모슬포에 다녀오는 날 있었지

오년이 지났어도 해배*는 기약 없고

몰락의 시간은 길었지

가슴 가운데 숭숭 구멍 뚫린 바위가 되어

파도의 손바닥에 철썩철썩 얻어맞으며 막막하던 나를

물새들이 애처로이 내려다보곤 했지

얼마나 많은 슬픔들이 바다로 흘러드는지

얼마나 많은 상처들이 모여서 난바다 가득 반짝이는지

모슬포 모랫벌에 서면 알 수 있지

몹쓸포 몹쓸포 하면서도 살아야 하는 나날은 밀물처럼 밀려왔지

온종일 슬픔에 젖어서 모슬포에 다녀오는 날은

파도에 씻긴 몽돌을 손에 쥐고

오래 오래 물결소리 듣곤 했지

땅끝까지 와서도 오연*했으나

바다를 건너와서는 그걸 내려놓기로 했지

버림받은 세월을 건너는 길은 깊어지는 수밖에 없었지

바람 속에서 천천히 먹을 갈기도 했지

바닥까지 떨어진 뒤에 너는 어찌했는지

섬에게 물어보기로 했지

독풍은 우리를 길들이기 위해 찾아오는지

쓰러뜨리기 위해 찾아오는지 해송에게 물어보기로 했지

아니지 이 세월을 받아들인 건 언제부터였는지

말없는 모슬포에게 물어보기로 했지

말없는 몹쓸포 못살포에게

 

--

*해배 : 유배가 풀림

*오연 : 오만

   

 

 

별을 향한 변명

 

별들이 우리를 보며 눈빛을 반짝이는 거라고 믿었다

밤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꿈꾸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은 모두 선한 씨앗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사랑이 손짓해 부르면 그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고

물불 안 가리고 사랑의 강물에 뛰어들었다

이길 수 없는 것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판판이 깨지고 나서도 지지 않았다고 우겼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도 희망을 이야기했다

시인이 아름다운 꿈을 꾸지 않으면

누가 꿈을 꾸겠느냐고 시를 썼고

견딜 수 없는 걸 견디면서도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말자고 편지를 썼다

이 길을 꼭 가야 하는 걸까 물어야 할 때

이 잔이 내가 받아야 할 잔인지 아닌지를 물었다

우리가 꾼 꿈이 이루어지는 것인지 별에게 묻고

별이 대답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꿈꾸고 사랑하고 길을 떠나자고 속삭였다

그것들이 내 불행한 운명이 되어가는 걸

별들이 밤마다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해장국

 

사람에게 받지 못한 위로가 여기 있다

밤새도록 벌겋게 달아오르던 목청은 식고

이기지 못하는 것들을 안고 용쓰던 시간도 가고

분노를 대신 감당하느라 지쳐 쓰러진 살들을

다독이고 쓰다듬어줄 손길은 멀어진 지 오래

어서 오라는 말 안녕히 가라는 말

이런 말밖에 하지 않는

주방장이면서 주인인 그 남자가 힐끗 내다보고는

큰 손으로 나무식탁에 옮겨다 놓은

콩나물해장국 뚝배기에 찬 손을 대고 있으면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어디서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랴

떨어진 잎들이 정처를 찾지 못해 몰려다니는

창밖은 가을도 다 지나가는데

사람에게서 위로보다는 상처를 더 많이 받는 날

해장국 한 그릇보다 따뜻한 사람이 많지 않은 날

세상에서 받은 쓰라린 것들을 뜨거움으로 가라앉히며

매 맞은 듯 얼얼한 몸 깊은 곳으로 내려갈

한 숟갈의 떨림에 가만히 눈을 감는

늦은 아침

   

 

 

병든 짐승

 

산짐승은 몸에 병이 들면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다

숲이 내려보내는 바람 소리에 귀를 세우고

제 혀로 상처를 핥으며

아픈 시간이 몸을 지나가길 기다린다

 

나도 가만히 있자

     

 

화인(火印)

 

비 올 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자

마른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오후에는 먼저 온 빗줄기가

노랑붓꽃 꽃잎 위에 후두둑 떨어지고

검은등뻐꾸기는 진종일 울었다

사월에서 오월로 건너오는 동안 내내 아팠다

자식 잃은 많은 이들이 바닷가로 몰려가 쓰러지고

그것을 지켜보던 등대도

그들을 부축하던 이들도 슬피 울었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섬 사이를 건너다니던 새들의 울음소리에

찔레꽃도 멍이 들어 하나씩 고개를 떨구고

파도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때리며 슬퍼하였다

잊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남쪽 바다에서 있던 일을 지켜본 바닷바람이

세상의 모든 숲과 나무와 강물에게 알려준 슬픔이었다

화인처럼 찍혀 평생 남을 아픔이었다

죽어서도 가지고 갈 이별이었다

     

 

흐느끼는 예수

 

만일 예수가 눈발 풀풀 날리는 철거 지역에 와서

꺼멓게 타버린 슬픔의 시선을 안고 몸부림치는

늙은 여인 곁에 앉아 울고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를 알아보았을까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해고노동자의

절망의 무게를 두 팔로 받아 안으려다

손에 피를 묻힌 채 흐느끼는 예수를 보았다면

우리는 그를 예수라고 믿었을까

 

가난한 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세상을 향해

예수가 독사에 빗댄 욕을 거칠게 내뱉었다면

우리는 막말하는 그에게 실망해 등을 돌렸을까

만일 예수가 로마의 군사기지 철조망 앞에 앉아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달라고 비에 젖으며 기도했다면

그날도 노인들이 군복을 입고 교회 앞에 몰려왔을까

 

만일 예수가 오늘 이 아침 이 땅에 와서

탐욕의 식탁과 향기 없는 정원

정의 없는 권력과 이성 없는 극단

자비 없는 기도를 비판한다면

그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을까

 

국정원이 몇 가지 비리를 언론에 넘기고

조간신문 기사로 돌팔매질한 뒤

감옥에 가두려 하지 않았을까

불법 체류자나 무슨무슨 주의자로 낙인찍어

이 땅을 떠나게 만들지 않았을까

 

만신창이가 된 채

진눈깨비 내리는 지평선 속으로

혼자 걸어가게 하지 않았을까

 

           *도종환 시집 사월바다’(창비, 2016.)에서

           *사진 : 솔향춤보존회 정기공연 중 상모판 굿’()국악연희단 하나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