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자의 모슬포 시편
♧ 모슬봉 호박꽃
맨땅에 퍼질러 익어 가도 좋으리
한 줄에 꿰어 자란 자매처럼 둘러 앉아
흑싸리 시월 단풍에 늙어 가도 좋으리
호박꽃도 꽃이라고 텃밭 한 쪽 밝히다
덩드렁 호박잎 넝쿨째 손을 펴서
일개미 가는 길목에 그늘이어도 좋으리
♧ 모슬포 1
-비가
역사
-설운 대정님네
노역에 지친 억새무리 저 간곡한 손짓
종으로 횡으로 허우적허우적 격납고를 지날 때
뼈마디 하얀 저음에 되레 가슴 후비더라
신념인지 이념인지 죽어서도 못한 염
푸른 하늘 붉은 하늘 잿빛하늘 그 하늘
툭 하면 안색을 바꿔 무릎 꿇게 하더라
알드르의 바람은 늘 헛바퀴만 돌더라
화산 섬 끓는 속 시커멓게 게워낸 바람
그 바람 대정사람은 배설창지 다 알더라
신축 년 참수당한 이제수도 잊히더라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삼의사비 가시밭길
엉겅퀴 봉두난발에 거꾸로 피가 솟더라
거짓말을 안 한다는 흙에다 마음을 심어
올 저 땡볕에 심은 데 또 심는 양배추모종
하늘도 모슬포에선 한눈을 팔더라
♧ 모슬포 2
-연가
새도림,
-곱게 저승 가져시냐
눈 밟혀 못 가신가 마음 밟혀 못 보내신가
난장도 그런 난장 살암시난 살아져
저 햇살 꽂힌 족족이 피는 꽃이 아파라
고 작은 날개로도 봄바람을 실어와
송악산 어혈 삭이는 바람꽃 몸짓을 보라
지아비 떠난 그 자리 꽃 재롱이 아파라
이승의 바람소릴랑 귓등으로 흘리십서
보리 밥 한 술에도 꽉 막히는 오목가슴
괭괭괭 저승 길 닦는 꽹과리가 아파라
모슬포 들썩들썩 뒈싸진 저 바당을
오늘은 노을 달군 방어 잡이 배 두 척이
물주름 곱게 펴놓은 먼 길 앞이 아파라
♧ 모슬포 3
-그 딜 누겐들 모르크냐
흙냄새 비린 냄새 땀 냄새 버무려져
웬만한 세파쯤이야 사람 사는 내음이려니
살 냄새 자리 젓 냄새 익는 밤이 짧더라
물 봉봉 가슴 봉봉 먹먹한 날 어찌 없으랴
물허벅 장단이면 어느 장단을 못 맞추랴
대정 땅 대정몽생이 반 치키고 반 하시하더라
역풍에 쓸려 와서도 북향으로만 돌아앉더니
탱자나무 가시바람 유배 땅 그 바람도
추사의 붓 끝에 멈춰 세한도로 돋보이더라
후덕한 모슬봉이 치마폭 인심이더라
송악산 엎딘 내력 등만 밟고 가더라
“또 옵서” 하지 않아도 모슬포가 그립다더라
♧ 모슬포 칠월칠석
비 오네
절뚝절뚝
짝 그른
팔다리 끌고
홀아비 바느질 같은 낮은 밭담 넘어 와
솔째기
문 두드리며
젖은 발로
오는 혼백
콩 볶듯
맬젓 담듯
섯알오름의 슬픈 직유
죽기 살기 살다보면 몽글기도 하겠건만
아직 이 비린언어를
삭히지 못한 일
모슬포 바람살이
기죽을 틈이나 줍디가
마디 곱은 어멍 손
별떡 달떡 빚어놓고
배롱이 초저녁부터
마당 한 뼘 밝힙디다
오십서
칠월칠석
까마귀 다 아는 제사
직녀 표 수의 입고
견우 씨 소등을 빌려
산발한
늙은 팽나무
기다리는
큰 길로
*이애자 시집 ‘하늘도 모슬포에선 한눈을 팔더라’(시와 표현, 2016)에서
사진 : 모슬포 주변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