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택 시집 '꿈의 내력'
♧ 시인의 말
탐구는 필요성의 소산이다. 필요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무엇을 탐구하는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오래 전부터, 나에게는 개인적 필요성 때문에 시의 방법으로 탐구하고 싶은 대상들이 여럿 있었다.
이 첫 시집에서는 그 대상들에 대한 탐구를 ‘제1부’에서의 자아 탐구, ‘제2부’에서의 예술 탐구 ‘제3부’에서의 일상 탐구, ‘제4부’에서의 여행 탐구로 한정했다. 굳이 ‘탐구’라는 말을 쓰는 이유 중에는 쓸모없는 넋두리나 감상을 배제하려는 속내도 숨어 있다.
시인이 시에서 ‘창작 의도를 얼마나 잘 구현했는가’ 하는 것은, 아무래도 독자가 수용한 창작 의도와의 일치 여부에 따라 대답해야 할 물음일 것이다.
2017. 2
저자
♧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무성한 숲, 긴 오솔길을 거니는 날
평평한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난
현저하게 울퉁불퉁한 오름 산길을
태풍이 몰려와 맹렬히 소리치는 날
섬과 섬이 서로 부딪치고 찢긴 후
어김없이 내 앞으로 달려오는 파도를
절망과 희망이 수시로 교차하는 날
바닷가 어느 높은 바위 위에 서서
갈 곳을 찾느라 망설이는 내 처지를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파도여, 말하라
어둠을 자르며 여기까지
달려온 태곳적 바다,
성난 숨결의 메마른 외침을
어떻게 거두어야 하는지를
터무니없이 억울한 세파를
얼마나 겪었기에, 절규하듯
포말로 우리의 일상을 감으며
재빨리 사라져야 하는지를
밤에는 별과 달이 지켜
잔잔하지만, 낮에는 왜
돌과 바람에 날카롭게 부딪히는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를
천 길 낭떠러지 밑에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가
미래의 저쪽으로 달려가기 위해
기어코 신경을 움직여야 하는지를
모래 위로 파랗게 밀려온 후,
들린 듯 검게 휘저으며
소멸하는 과거의 흔적을 붙잡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하는지를
파도여, 말하라.
♧ 나무에 대해 잘 말하기 위해서는
나무는 숲속의 어느 자리에 항상 서 있다. 하지만 나무에 대해 잘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숲속의 그 자리에 항상 서 있다는 사실과 함께, 다른 나무와 항상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결국, 나무에 대해 잘 말하기 위해서는 나무가 항상 서 있는 구체적인 자리는 물론이고 다른 나무와 맺고 있는 구체적인 관계도 파악해야 한다.
♧ 구름은
하늘의 중간 높이에 자리 잡은
천사들의 놀이터였다.
우기의 길고 긴 터널
이끼 낀 벽에
드문드문 걸려 있는
나무 액자 속의 산수화였다.
분노와 비애를 잔뜩 실은
허름한 마차의 초상이었다.
쇳덩어리로 다소곳이 앉아 있다가
처음에는 서쪽을 향해 움직이고
나중에는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였다.
미세한 찬바람이 쉴 새 없이
복잡한 신경의 미로로
불어오는 지금은
내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다.
♧ 꽃들의 소통 방법
꽃들이 말하고자 한 것은
나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달랐다.
조용히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왁자지껄하게 외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일반적인 소통 방법이었다.
왁자지껄하게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은
살아온 생애가 고단했고
세상이 소란스럽기 때문이었다.
♧ 오늘 걸었던 길이
어제 걸었던 길은
그제 걸었던 길과 같지 않았는데
오늘 걸었던 길과
어제 걸었던 길은 같았다.
오늘 걸었던 시간과 날씨가
어제와 같았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이유는 바꾸지 않으려는 내 마음에 있었다.
오늘과 어제의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내 마음에 있었다.
오늘 걸었던 길이
어제 걸었던 길과 같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김병택 시집 ‘꿈의 내력’(새미, 201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