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운 시조집 '오래된 숯가마'의 봄
♧ 춘란 꽃
하필이면 된비알에
갈잎 지던 소리가
꼬불꼬불
졸참나무 숲
도토리 떨던 바람이
봄 햇살
눈에 차는지
꽃망울 배시시 버네
♧ 가시리
마른 풀잎 비집고 민들레꽃 눈을 뜬다
남조로 샛길 따라 따라비오름 먼발치
섬동백 울타리 박힌 섬 중의 섬 가시 마을
‘가시리’ 하면 ‘가시리 잇고’ 동박새가 화답할까
국밥집 나목도*에 손님 한둘 오가는지
가셨던 어지럼증이 4월 밟고 다시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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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도 : 가시리에 있는 순대 국밥집. 김영갑 형이 생전에 많이 이용했음.
♧ 마른 산수국
온 섬에 폭설이 내려 길이 모두 지워진 날은 사려니숲길을 천천히 걸어가 보라 산수국 마른 꽃잎들 결로 남아 흔들린다
산에 든다는 건 마음을 비우는 일, 그러기에 야생화도 마른 꽃이 되기에는 바람에 향기를 풀고 색소까지 내줘야 한다
요즘 길섶에는 겨울 나비 한창이다 오가는 사람들의 동공 가득 묻어나는 가벼운 꽃의 날갯짓, 지난여름 꿈의 잔상들!
♧ 겨우살이
한라산 중턱에도 봄은 오는가 보다
듬성듬성 잔설이 발목을 당기지만
참나무 근육질 어깨에
햇살 쟁이는 겨우살이
모를 일이다, 정말 모를 일이다
갈참나무 졸참나무, 명가의 권속들이
무작정 거두어 줬던
근본 없는 떠돌이들
아마도 산에 살아 산을 닮아 그런 거다
시골장 국밥그릇에 넘치는 인심 같은
나 오늘
산을 오르며
그런 맘 읽어낸다
삼광조 팔색조 큰유리새 흰눈썹황금새
계절풍에 실려와 둥지를 틀 즘이면
나무도 새들처럼
그늘 내어 품어준다
♧ 올레길 송악
온종일 걸어도 발이 들뜨는 제주올레
허술한 담장일수록 송악이 무덕졌다
바람도 이 길에 들면
안부를 묻곤 한다
돌담에 기댄 만큼 길어지는 그림자 따라
햇볕 공양 받겠노라 고개를 더 내밀까
현무암 불 덴 흔적을
푸르게 감싸준다
계절을 탄다면야 가을 남자 아니래
봄여름 다 보내고 갈걷이에 꽃이 피는
턱을 괸 송악 열매들
거무데데한 사내들
섬에 산다는 건 절반은 기다림이다
수평선에 배 닿아도 마냥 설레느니
올레길 나무 우체통
엽서 넣는 떨림 같은
♧ 흑룡만리*
누군가 그리워 만 리 돌담을 쌓고
참아도 쉬 터지는 이 봄날 아지랑이 같은
울 할망 흘린 오름에
눈물이 괸 들꽃들
차마 섬을 두고 하늘 오르지 못한다
그 옛날 불씨 지펴 내 몸 빚던 손길들
목 맑은 휘파람새가
톱아보며 호명하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한뎃잠을 자야한다
그래서 일출봉에 마음은 가 있지만
방목된 저녁노을이
시린 발을 당긴다
섬에 가두어진 게 어디 우마뿐이랴
중산간의 잣성도, 낙인된 봉분들도
먼 왕조 출륙금지령으로
그렇게 눌러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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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만리 : 제주의 현무암 잣담을 이르는 말.
*홍성운 시조집 ‘오래된 숯가마’(푸른사상, 201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