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 시집 '산정의 나무'의 봄
♧ 봄꽃
봄꽃은 비장하다.
죽음에 다가선 이의 얼굴에
확 피어나는 검버섯처럼,
유언처럼,
봄꽃은 엄살 같고, 추문 같고,
기만적이다.
긴 겨울 동안의 인내의 한계,
제 목숨 부지에 대한 불신에서
꽃이 핀다.
죽는 줄만 알고 꽃을 피운다.
봄꽃은 비굴하다.
제 몸을 밀고 올라오는
새싹 앞에서의 쑥스러움,
생명의 처음과 끝의 부조화.
삶은 누추하다.
♧ 이운 봄
한 세월이 이우는 소리를
나무가 먼저 듣는다.
가지 끝 마른 낙엽 끝내 지고
먼 호숫가의 그늘에서
누군가 혼자 울고 있다.
노란 햇살에 응어리진 봉오리들
백양나무 가지 위로 풀리며
더 먼 기억의 껍데기들을 밀어내자
그가 떠난 자리에 작은 웅덩이 하나
검게 빛나고 있다.
새가 울고 또 다른 새가 울고
다리를 잃고 부리를 잃고
썩어가는 날개의 그림자들
화석처럼 번지는 양지에
비수처럼 솟아오르는 푸른 싹들.
♧ 아버지의 농사
평생 농사를 지은 아버지는
뿌린 대로 거두지 못하신다.
봄에 밭을 갈아
여름 가고 가을이 오면
곡식들이 무성히 자라나곤 하지만
뿌리지 않은 풀들이 더 무던하였다.
농사는 뿌리고 거두는 것이 아니라
땅에 바치면 하늘이 돌려주는 보상이라고 하실 뿐
아버지는 자연과 겨루지 않으신다.
오늘도 아버지 지팡이 짚고
밭으로 나가신다.
몸은 땅에 바치고
영혼은 하늘로 돌아가리라 믿으시며.
♧ 찔레꽃
늘 몸살이고 만날 엄살이지만
나는 봄이 견디기 어렵다.
슬그머니 겨울잠 깬 뱀처럼
뜨락의 가지들 끝으로 번져나가는
초록의 물결무늬들 따라
열매도 못 맺는 헛꽃들
덩달아 술렁이는 사춘기.
이미 저질러진 삶을 어쩌겠느냐고
그늘 위로 새싹 파랗게 드리우며
알록달록한 치맛자락 살랑대는
저 봄바람 속 봄볕의 능청에
하얗게 번지는 찔레꽃 무더기.
♧ 배꽃
삶이 아주 살 맛 나려면
거의 고통스러워져야 한데요.
괴롭지 않으면서 충만한 것이 어디 있나요.
과유불급의 충만함이 있을까요.
다 너무 지나치거나 부족한 것 아닌가요.
아주 심심하거나 괴롭거나 한 것 아닌가요.
그 사이에서 팽팽히 당겨지는
추락 직전의 무게는 어떤가요.
나는 배꼽이 자꾸만 가려워요.
이 무거움의 비밀은 시간이죠.
내 심장은 술처럼 익어가다가 썩을 거예요.
과육이 향기로 사라질 때까지
바람을 밀어내는 적당히 무거운 날개로
제 몸 가누는 저항을 느낄 수 있는 한계로
멀리 멀리 날아가고 싶어요.
제가 무겁지 않다면 날고 싶었을까요.
소멸이 없다면 살고 싶었을까요.
맑은 하늘에 하늘거리며 날아가는
배꽃송이 하얀 나비 한 마리처럼.
♧ 아름다운 우리 꽃
꽃이라는 글자는
꼭 꽃같이 생겼다.
ㄲ으로 꽃잎 두 개 올리고
오! 하며 암술과 수술
한가운데 심어 놓고
떨어지는 꽃가루에
꽃잎 세 개 받치면
활짝 피어나는 꽃 한 송이.
내가 그 이름을 부르려면
아무래도 꽃이라고 쓸 수밖에 없을
하얀 종이 위의 꽃들.
꽃!, 꽃!, 꽃!…이라고 쓰면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난다.
나는 꽃 한 송이 곱게 묶어
품에 안고 싶어서
“꽃”,이라고 쓴다.
둘레에 벌들이 날아든다.
♧ 장미
내 어린 애인은 두 눈이 쌍꺼풀이라네
엷은 졸음에 겨워 겹겹이 감기는 눈길 속
갈래 갈래로 열기는 꿈길
네가 사는 나라는 가깝고도 아득하여
눈앞에 보여도 닿을 수 없네
열락의 잔을 들던 옛날의 기억들
가녀린 악기 소리 울리는 나무들
한 줄기 향기로 봉해버린 아름다움의 미로
돌아가는 길을 영영 잊어버린
내 두 눈 속의 백일몽의 나라
내 애인은 어린 장미꽃이네
♧ 봄동
꽃샘바람 부는 날
고향에서 소포를 부쳐 왔다.
겨울을 난 연초록 봄동 배추 몇 다발
멸치 넣고 된장 풀어 국을 끓이다가
노르스름 물 오른 꽃대를 꺾어
물잔에 심어놓았다.
밤새 고향의 들판이 꿈에 보이고
아침에 다시 봄동을 다시 보니
노랗게 꽃이 피어나
남쪽 창가로 고갤 돌리고 있다.
*진하 시집 '산정의 나무'(문학의전당, 200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