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진하 시집 '산정의 나무'의 봄

김창집 2017. 3. 23. 17:16



봄꽃

 

봄꽃은 비장하다.

죽음에 다가선 이의 얼굴에

확 피어나는 검버섯처럼,

유언처럼,

봄꽃은 엄살 같고, 추문 같고,

기만적이다.

 

긴 겨울 동안의 인내의 한계,

제 목숨 부지에 대한 불신에서

꽃이 핀다.

죽는 줄만 알고 꽃을 피운다.

 

봄꽃은 비굴하다.

제 몸을 밀고 올라오는

새싹 앞에서의 쑥스러움,

생명의 처음과 끝의 부조화.

 

삶은 누추하다.

     

 

이운 봄

 

한 세월이 이우는 소리를

나무가 먼저 듣는다.

가지 끝 마른 낙엽 끝내 지고

먼 호숫가의 그늘에서

누군가 혼자 울고 있다.

 

노란 햇살에 응어리진 봉오리들

백양나무 가지 위로 풀리며

더 먼 기억의 껍데기들을 밀어내자

그가 떠난 자리에 작은 웅덩이 하나

검게 빛나고 있다.

 

새가 울고 또 다른 새가 울고

다리를 잃고 부리를 잃고

썩어가는 날개의 그림자들

화석처럼 번지는 양지에

비수처럼 솟아오르는 푸른 싹들.

 

 

아버지의 농사

 

평생 농사를 지은 아버지는

뿌린 대로 거두지 못하신다.

봄에 밭을 갈아

여름 가고 가을이 오면

곡식들이 무성히 자라나곤 하지만

뿌리지 않은 풀들이 더 무던하였다.

 

농사는 뿌리고 거두는 것이 아니라

땅에 바치면 하늘이 돌려주는 보상이라고 하실 뿐

아버지는 자연과 겨루지 않으신다.

 

오늘도 아버지 지팡이 짚고

밭으로 나가신다.

몸은 땅에 바치고

영혼은 하늘로 돌아가리라 믿으시며.

   

 

 

찔레꽃

 

늘 몸살이고 만날 엄살이지만

나는 봄이 견디기 어렵다.

슬그머니 겨울잠 깬 뱀처럼

뜨락의 가지들 끝으로 번져나가는

초록의 물결무늬들 따라

열매도 못 맺는 헛꽃들

덩달아 술렁이는 사춘기.

이미 저질러진 삶을 어쩌겠느냐고

그늘 위로 새싹 파랗게 드리우며

알록달록한 치맛자락 살랑대는

저 봄바람 속 봄볕의 능청에

하얗게 번지는 찔레꽃 무더기.

     

 

배꽃

 

삶이 아주 살 맛 나려면

거의 고통스러워져야 한데요.

괴롭지 않으면서 충만한 것이 어디 있나요.

과유불급의 충만함이 있을까요.

다 너무 지나치거나 부족한 것 아닌가요.

아주 심심하거나 괴롭거나 한 것 아닌가요.

그 사이에서 팽팽히 당겨지는

추락 직전의 무게는 어떤가요.

나는 배꼽이 자꾸만 가려워요.

이 무거움의 비밀은 시간이죠.

내 심장은 술처럼 익어가다가 썩을 거예요.

과육이 향기로 사라질 때까지

바람을 밀어내는 적당히 무거운 날개로

제 몸 가누는 저항을 느낄 수 있는 한계로

멀리 멀리 날아가고 싶어요.

제가 무겁지 않다면 날고 싶었을까요.

소멸이 없다면 살고 싶었을까요.

맑은 하늘에 하늘거리며 날아가는

배꽃송이 하얀 나비 한 마리처럼.

   

 

아름다운 우리 꽃

 

꽃이라는 글자는

꼭 꽃같이 생겼다.

으로 꽃잎 두 개 올리고

! 하며 암술과 수술

한가운데 심어 놓고

떨어지는 꽃가루에

꽃잎 세 개 받치면

활짝 피어나는 꽃 한 송이.

 

내가 그 이름을 부르려면

아무래도 꽃이라고 쓸 수밖에 없을

하얀 종이 위의 꽃들.

!, !, !이라고 쓰면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난다.

 

나는 꽃 한 송이 곱게 묶어

품에 안고 싶어서

”,이라고 쓴다.

둘레에 벌들이 날아든다.

     

 

장미

 

내 어린 애인은 두 눈이 쌍꺼풀이라네

엷은 졸음에 겨워 겹겹이 감기는 눈길 속

갈래 갈래로 열기는 꿈길

네가 사는 나라는 가깝고도 아득하여

눈앞에 보여도 닿을 수 없네

열락의 잔을 들던 옛날의 기억들

가녀린 악기 소리 울리는 나무들

한 줄기 향기로 봉해버린 아름다움의 미로

돌아가는 길을 영영 잊어버린

내 두 눈 속의 백일몽의 나라

내 애인은 어린 장미꽃이네

   


봄동

 

꽃샘바람 부는 날

고향에서 소포를 부쳐 왔다.

겨울을 난 연초록 봄동 배추 몇 다발

 

멸치 넣고 된장 풀어 국을 끓이다가

노르스름 물 오른 꽃대를 꺾어

물잔에 심어놓았다.

 

밤새 고향의 들판이 꿈에 보이고

아침에 다시 봄동을 다시 보니

노랗게 꽃이 피어나

남쪽 창가로 고갤 돌리고 있다.


*진하 시집 '산정의 나무'(문학의전당, 200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