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내일을여는작가' 시 당선작
한국작가회의에서 내는 문학지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에
박금주의 ‘게스트하우스’외
5편이 당선되었다.
‘생성에 대한 욕망이 비릿하게 살아있다’는 점이 장점이고,
‘삶에 대한 의지가 작품에 힘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다.
박금주 작가는
1959년 부산 출생으로
현재 제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심리상담사로 활동 중이다.
당선작 중 시 2편을 옮겨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을 담은
사진을 곁들인다.
♧ 게스트하우스
목적지에 대한 강박은 없어요, 떠나는 게 먼저니까요. 한 칸의 방이 있다면 어디여도 좋아요. 여행지의 방 한 칸이란 창문에 걸린 낯선 하늘빛과 이름 짓기 힘든 모호한 냄새와 작은 거울 속 낯익은 얼굴 하나로 완성되지요. 하루가 저물면 관절 삐걱대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쳐다봅니다. 무슨 얘기라도 들으려고 귀가 커다래진 방에서 조심스럽게 말하죠. 아기를 낳으려 왔다고요. 방은 놀라지 않아요. 살아 있는 건 뭐든 낳게 마련이니까, 뱃속 아기는 때가 되면 제 길을 밝히잖아요. 그만한 여행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래요. 내 속에 너무 오래 있어 팔다리가 길게 자란 아기, 이제는 떠나겠다, 보내 달라 보채는 아기를 낳으려 왔어요. 이 동네에 강이 있다는 얘길 들었어요. 작은 개울이어도 괜찮아요, 흐르는 물속에 들어가 피로 깜깜하게 엉겨 붙은 아랫도리를 벗고 편안히 앉겠어요, 길고 긴 진통이 온몸을 후벼 파겠죠. 그러나 마지막 산통으로 새벽녘이 다시 깜깜해진 순간 뜨거운 피와 함께 아기를 바깥으로 쑥, 밀어내겠죠, 박명에 온몸이 푸르스름하긴 해도 분명 예쁠 거에요. 그건 내가 오래 품어온 슬픔이니까요. 아이는 나를 알아보고 내 손을 잡고 인사를 하죠. 그리고 서둘러 떠나가지요. 안녕, 아가야. 나는 기꺼이 그 애를 놓아주겠어요, 그러면 나는 마음속에 빈자리를 간직한 어미가 될 테지요. 거기에 작은 창과 향기로운 차와 따뜻한 벽난로가 있는 방 하나를 꾸미겠어요. 언제나 슬픈 얼굴의 손님을 먼저 재우겠어요, 그 손님은 아마도, 내가 낳은 당신일 테니까요.
♧ 골목
환한 대낮이었으면 그냥 지나칠 뻔했지요
누가, 낡은 양말 목을 뒤집어 들고 다급히 부른 것처럼
걸음 세워 왼쪽으로 고개 돌려 바라본 거기
방금 휘저어진 우물 밑바닥 같은 표정으로 골목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늘 속 더 진한 그늘로 담에 기대 담배를 피우던 사내가
아무렇게나 밟아 끄고 간 담배꽁초 같은 시간들이 먼 데서 달려오고
내가 참석한 연회와 가담하지 못한 모의의 순간들이,
쿵쿵 뛰었을 골목의 심장과 숨죽인 작은 창문들을 흔들어댔습니다
끝 간 데가 막다른 유전자를 나눠 가진 골목과 내가 함께
발목을 담근 적이 있던 이곳,
우리, 만난 적이 있었던가요
만난 적 없으나 잘 알고 있는 숱한 기척들이 술렁이며
좁은 골목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전생을 송두리째 던져 넣어 펼쳐봅니다
매일 하품을 하듯 새벽을 낳아 두런두런 기르고 싶어
어둠이 시간을 가두어버리듯 쿵쿵대는 아이들의 발소리를 채집하고 싶어
함락되지 않는 저 담쟁이들을 삼키고 싶어
백열등 아래 선 것처럼 첫눈에 당신의 속내가 다 들여다보였습니다
울음처럼 내려앉는 어둠을 받아 마시다 사레들린 듯
좁은 목구멍을 뒤틀어 나를 뱉어내며 골목이 말했습니다
얼마나 더 흘러야 물이겠습니까
얼마나 더 가야 당신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