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산림문학'이 만난 문인 김영자

김창집 2017. 4. 13. 08:49



산림문학’ 2017년 봄호(통권 25)

산림문학이 만난 문인으로

김영자 시인을 선정하고

그녀의 시 꽃문8편을 실었다.

 

김영자 시인은

전북 고창 출생으로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시집 양파의 날개’, ‘낙타뼈에 뜬 달’,

전어비늘 속의 잠등을 냈다.

 

 

꽃문


꽃의 살을 만질 수 있다 그 곳에 가면

흰 꽃숭어리들이 문밖에 서 있어

젖은 까닭을 물으며

어깨를 툭툭 건드릴 수 있다

 

손이 손에게 스며드는

깨끗한 탯줄을 타고

서로가 서로에게 젖어드는

문살에서 피는 꽃줄기를 보면서

내소사來蘇寺 그 오래된 집에 가면

헐렁한 속살을 친친 감고

천년 나무의 몸 속에 들어설 수 있다

 

젖은 까닭과 발가벗은 촉감이 엉겨

접목하는 순간

목수 예수는 몸속에서 짐을 풀고

먹줄을 잡아당기며 웃었다

꽃덩쿨을 새기는 중이였다

 

경계를 풀고 풀어 겹치는 꽃의 내부와

젖은 살의 이력과

쌓이고 쌓인 귀의 퇴적은

이동하는 뿌리의

오래된 집의 날개를 들고

꽃문을 그렇게 활짝 열고 있었다

    


절물에서 놀다

 

   절물에서 마시는 물은 한 그릇 아침밥이다 절 옆에 있었다는 물이 밥이 되는 아침에 밥은 한 숭어리 꽃이다 오름과 오름의 틈새로 숭어리 숭어리 피어오르는 흰 밥사발이 키 큰 겨울나무들과 함께 걸어 나오는 절물에서 새벽 첫물을 마시는데

 

   검은 날갯죽지 들고 몰려오는 새들이 몸을 푼다 까악 까아악 몸 열어 윤기 나는 노래를 보내니 놀고 싶어 한 바탕 땀 흘리며 놀고 싶어 겨울 까마귀들과 한판 놀고 싶어 까마귀 등을 타고 이륙할까

      


겨울 청기와 한 장 아시나요

 

  지리산 남쪽 품안을 샅샅이 안아 보셨나요 각황전覺皇殿 앞 석등 너머 숨어있는 기와 한 장을 만나셨나요 온몸의 촉수를 열고 당신을 기다리는 꽃잎을 만지셨나요 시린 울림으로 피고 있는 화엄사 겨울 올벚나무가 청기와 쪽빛 가슴 속에서 지금 동그란 눈을 뜨고 있어요  

 


각시붓꽃

 

   어둠 한 줌씩 떠내면서 새벽햇살을 기다렸다 들여다보다가 어 들여다보다가 그만 삽질을 했다 움켜잡고 가느다란 손가락뼈로 삽질을 하다가 왜 너를 갖고 싶었을까

 

   점퍼를 벗어 한 포기 너를 감싸 안고 내려오는 동안 맨손 떨림으로 입 맞추고 입 맞추며 품고 싶었던 까닭은 어디에서 왔을까

 

   해가 지나고 몇 해가 지났는데 각시붓꽃 가슴 속 내 각시야, 보랏빛 너를 안고 온 내 야윈 가슴이 부끄러워 송두리째 너를 탐낸 그 새벽, 손은 자꾸만 흰 달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호랑가시나무는 모항에서 새끼를 친다

 

   호랑가시나무는 모항茅港에서 새끼를 친다 자꾸만 새끼를 치더니 무릎 꿇는 어미의 몸은 모서리를 풀어풀어 둥글다 어리디 어린데도 제법 도톰해진 새끼들이 얼굴 그 각점角點의 뾰족한 기운은 도도하고 다부져서 얼굴 살이 올라서 이목구비가 훤칠해져서 칠산바다 빛으로 반짝거리는 생의 즐거움

 

   그러나 팽팽한 이야기, 여기서 태어나는 절정의 순간에 뿌리내렸던 어미는 모항의 해풍을 품어 안고 따스하고 작은 항구에서 제 살을 깎아 시퍼렇게 솟아오르던 시절을 통과하는 늙은 나무의 순례기

 

   모서리를 풀어놓는 일은 뾰족한 살의 각도를 깎아내는 일 삶의 둥지를 한바탕 놀이마당으로 여는 일 어미는 자꾸만 모서리를 깎는데 새끼들은 자꾸만 모서리를 만드는 모항에서 호랑가시나무가 붉은 나룻배를 탄다

   

 

 

벨링포젠 고원高原*에서

 

  생것이었어 날것이었어 마른 벌판, 살아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은 그 가슴주머니 속에서 작은 풀들이 돋아났어 해가 쏟아지고 비가 내렸어 키 작은 풀들은 숨소리 끌어안고 한 켜 한 켜 말씀을 쟁이고 있는데 어깨뼈의 고통 없이 태어난 태초의 살이 되어 눕고 싶었어 물 사발, 맑은 물그릇처럼 높은 그 곳에서 몸을 눕히고 싶었어 둥근 배꼽을 열어 놓으신 하느님의 탯줄을 타고 누워서 피는 물렁물렁한 잎사귀들의 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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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에 있는 해발 1,500m의 광활한 고원.


[사진] 1~2. 경주 기림사에서 본 꽃문 무늬  3. 제주 절물오름의 샘  4. 기림사 지장전

          5. 각시붓꽃  6. 호랑가시나무 7~8. 중국 고지대 샹글리아 여행 중에서 만난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