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우리詩' 6월호의 시와 박새꽃

김창집 2017. 6. 12. 13:55



오랜만에 산에 오르다

박새꽃을 만났다.

 

무리지어 핀 꽃들은

지금 씨방을 막 만들려고 준비 중이어서

지각한 꽃들을 골라 카메라로 붙든다.

 

이른 봄 낙엽수 아래서

맨 먼저 잎을 피워 한껏 햇살을 즐기고 나서

아직 꽃대를 못 세운 것들은 영양 손실이 된다고

줄기와 잎을 빨리 말려버리고,

씨받이 할 녀석들만 더러 남겨 둔다.

 

종족 보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인식의 뱀이 은신처를 벗어나려 할 때 - 남정화

 

안압지 고요한 물아

귀면와 눈알들 부라리며 노려보는 곳

곱돌 도자기마다 우우 도공의 거친 숨소리

물에 빠져버린 저 어둠들

나와 함께 심연의 골짜기로 들어가

맹금류가 되어 후드득 날아다니고

출렁거리는 물 속 세상

끝이 보이지 않는 곳

더 나아갈 수 없는 지점

그 끝에서 뛰어내려

위로 위로 위로 점 점 번져가는 저 아래

 

징글징글한 인식에 갇혀버린 몸뚱이들

한 데 뒤엉켜 엉거주춤

춤을 춘다면  

 

 

- 남대희

 

비 그치고

산기슭이 봄을 꺼내 널었다

아직, 뚝뚝 물기 흐르는 파릇한 새봄이다

 

한 줌 햇살에 허공이 파랑을 내고

바람결에 목련 꽃대는

누이의 교복 같은 순한 미소를 올망졸망 피웠다

 

지난 가을부터 가슴을 열고

하늘을 품었던 왕버들의 팔뚝이

연둣빛으로 울컥거린다

 

그냥 보내는 세월은 없다

가슴 열지 않았다면,

저 푸른 별빛, 저 맑은 허공을 품지 못했다면,

눈부신 연둣빛 속살 어찌 얻었으랴

 

비 그치고

호수가 올챙이 앞다리를 까맣게 키우는,

향기마다 빛 고운 촉촉한 봄이다

   

 

 

벚꽃 - 성숙옥

 

화려하게 피어난 꽃을 들춰 봅니다

나무는 제 몸을 공작의 날개 같이 펼치고 있습니다

흔들고 두드려서 피어난 별빛의 프롤로그

 

봄을 품고 빛나는 꽃잎에

탄성의 밑줄 그어봅니다

천천히 왔다 서둘러 가는 것들,

머지않아 꽃비로 흩날려 갈

빛나는 풍경이

찰나라고 서럽게 읽힙니다

 

떠나고 다시 오는

자연의 법칙 앞에서

소멸을 품은 절정이 명귀절입니다

부르지 않아도 오고 붙잡아도 가버리는 것들의 단상

홀린 듯

읽고 또 읽어도 다시 읽고 싶은 꽃을 넘깁니다

봄빛을 하얗게 밝히고 있는 벚나무책방에서

     

 

꽃살문 - 김혜천

 

문은 안과 밖을

빛과 어둠을 연결하는 고리

빛으로 돌아온 바깥은

안에 들어 자신을 본다

 

절집은

빗살무늬 솟을무늬

그 경계에 꽃을 피운다

 

꽃은 소박한 심성과 염원의 만남

 

연의 정화

모란의 가열

국화의 오랜 머뭄

금강저의 올곧은 힘

 

어둠이 옹이를

어루만지듯

햇살이 살피살피 피워 낸

소리 없는 법문 


 

 

이유 - 이주리

 

검은 아스팔트, 옆구리에 푸른 밀싹 자라났다

자본의 정수리에 보란 듯 돈 안 되는 푸르름을 싣고

들판 위에 쓰여진 가난한 언어

유리바다 위에 뿌려진 유예된 추수

낫으로 꺾일 운명마저 아름다운

 

베란다, 잊었던 양파 검은 봉지에서 푸른 싹이 자라났다

아시아 남서부 푸른 들판의 기억 어쩌지 못해

백합과의 가문의 전통 어쩌지 못해

때 절은 짜장면집 식탁의 현실도 어쩌지 못해

칼로 벗겨질 운명마저 아름다운

순하디 순한 복종

   

 

 

고비 - 양승준

 

누가 날 안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겨울 한철을 보낸 적이 있었다

홀로 추위를 견디는

백목련의 꽃눈 같은 심정이랄까

사막에서의 일상도 이러할 것이다

매순간 순간이 고비이듯

 

아직 내게 혀가 있다는 게

이렇게 거추장스러운지 이제야 알았다

사막에서는 오늘도

한바탕 모래폭풍이 지나갔으리

머지않아 내 방은

혀의 무덤들로 가득 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