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시집 '비밀'에서
♧ 꽃이 지고 나서야
하루에도 열두 번씩
너를 보고 싶었다
마음만 마음만 하다
눈멀고 귀먹고
마음이란 것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구나
꽃 지고 나서야
열매를 맺다니
꽃이 피면 뭣 하나
꽃 지면 뭘 해?
♧ 야생野生
이리저리 어슬렁어슬렁 흔들리노니,
구름에 몸 맡기고 물처럼 흘러가다
꽃 속에 뒹굴든가 꽃잎 물고 죽든가
홀로 가도 들판에 바람은 불어오고
달빛은 내 그림자 가지고 놀고 있네.
싸늘한 바람소리 옷깃을 여미면
새들은 풀어헤치며 깔깔깔 웃고 있네
향 피워 하늘의 넋을 불러 내리고
술 따뤄 지하의 내 얼을 데려다가,
야생으로 살고 싶어 말씀을 버린다.
♧ 반성
네 예쁜 얼굴 너무 많이 봤구나
네 아름다운 목소리 너무 오래 들었구나
네 고운 마음 너무 오래 훔쳐 왔구나
네 고요 속에 너무 길게 머물렀구나
아직도 깰 줄 모르는 나의 어리석은 꿈!
♧ 이사
한평생이 꿈이었다 말하지 말라
꿈의 먼지였다,
먼지의 꿈이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먼지가 구석구석 뽀얗게 쌓여
온몸이 먼지의 왕국이다.
요염한 먼지의 나라,
은밀한 먼지가 지천인 세상이다.
먼지의 부피
먼지의 무게
먼지의 압력
도저히 떠메고 갈 수가 없다.
한평생이 한 알 먼지였으니
바람 불고 비 오는 날
나를 이사하리라
먼지 인 시간의 영원 속으로!
♧ 선언善言
한평생 살았는데
할 말이 없네.
남길 것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땅 한 번 내려다보니,
구름은 얼굴을 바꾸고
물은 흘러갈 뿐!
♧ 오동나무 사리
삼각산 도선사 앞 산록
옛 암자터
백년 된 오동나무 성자가 서 계시다
한때는 까막딱따구리의 집이 되어 주던 나무,
속살로 새끼를 품어 기르던 때
그때가 한때였을까
지금은 사리로 서서 화엄의 경을 펼치고 있다
자연의 조화를 보여 주기 위해
자연의 질서를 설법하기 위해
죽어서도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온몸이 하나의 흰 뼈다
천년의 자연은 이런 것이라고, 그리고
천년의 순환을 보여 주기 위해
평생 단벌로 살다 가신 스님
죽어서도 환하게 웃고 계시다.
♧ 실어증失語症
얼마나 싫으면 말을 잊는가
싫다 싫어 나는 네가 싫다 구름이 말한다
그래 그래 나도 네가 싫다 바람이 말한다
부모와 자식 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
나와 우주 사이
꽃과 나무와 새가 말이었고
하늘과 바다와 산이 말이었다
밥과 사랑과 미움과 그리움이 말이었다
웃음과 울음과 아픔과 기쁨이 말이었다
실어증에 걸린 사람들의 눈에는
풍경은 흔들리기만 할 뿐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눈을 뜨고 자는 붕어가 말한다
세상이란 내 옆에 네가 있고
나 아니면 너라고, 아니 우리라고
무엇으로 입을 떼어 말문이 트이게 하나
모두가 절단났다고 절벽으로 뛰어내리고 있다
이제는 절망이라고 울음을 터뜨려도
말을 잊은 너는 듣지 못한다
한때는 침묵도 멋진 말이었지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얼떨결에 말해도 말이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잘못 말한 것도 말인데
싫다고 싫다고들 말을 하지 않는다
싫어! 싫어!가 실어失語를 실어 오는
적막한 세상.
* 洪海里 시집 『비밀』(우리글 대표시선 17. 2010.)에서
사진 : 요즘 열매를 달고 있는 때죽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