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 9월호의 시조
♧ 숲에 앉아 - 조병기
숲길을 가다가 문득
뻐꾸기 소리 듣는다
몇 해 만인가 뻐꾹 뻐꾹
보리누름에 찾아온 새
찔레꽃 하얀 향기
누님 생각 절절하다
건너 산 꿩이 울고
꾀꼴새 오락가락
떠났던 새들 돌아오니
얼마나 큰 축복이랴
어린 적 고향 마을도
눈 아래 와 있느니
♧ 음지론論 - 권갑하
오로지 한 뜻으로 빳빳이 결기를 세운,
햇살이지척이래도 한 발짝도 떼지 않는
나무도 그늘을 품어야
한 세상을 버티느니
외로움을 견뎌내야 마침내 오를 수 있는,
일생 음지만 걸어온 대시인의 자존인 양
아프게 가슴 헤집는
서늘한 한 줄의 문장
봐주지 않는다고 함부로 핀 꽃 있더냐
들어주는 이 없어도 연주는 계속되고
적자赤子의 귀가 길에도
불 밝히는 환한 웃음
♧ 민무늬 도배지 - 김삼환
희고 검은 얼룩을 한꺼번에 벗겨내자
벽지 속에 숨어 있다 모습을 드러내는
비겁한 그날의 습관 내 오욕의 그림자들
비화가 숨어 있는 벽 앞에 서서 보니
초벌 바른 도배지에 묻어나는 부끄러움
민무늬 색지를 골라 마른 벽을 덧바른다
♧ 지구별 - 나병춘
지구별 한 덩이
구르고 굴러서
달무리 별무리 은하와 더불어
이윽고, 여기 도착하다
해 뜨는 아침
♧ 일기예보 - 김종호
장마철 오락가락
빗나가는 일기예보
언제쯤 쾌청한 날에
산들바람 분다 할지
요즈음 종잡을 수 없는
갱년기의 여인 같아.
♧ 생인손 - 김영주
주인을 잘 못 만나 숨도 크게 못 쉬어본
짓다 만 말씀의 절[詩]
애물로 처박혔다
비겁을 뒤집어 쓴 채 시절 눈치 보고 있다
긴 날을 끌어안고 애면글면 속 끓이다
품을 수도 없으면서 놔주지도 못하는
살 속을 파고드는 살
아파도 넌 내 새끼
♧ 노송老松의 설법說法 - 류안
바람이 세차면 바위를 부여잡고
햇살이 따가우면 속으로 파고들어
세상이
그런갑다 저런갑다
따지지도 않았다
눈이 오면 움츠리고 비가 오면 추스르고
굽히라면 굽혀지고 웃으라면 웃다 보니
하늘에
뿌리 내리며
사는 법을 알았다
♧ 곶감 2 - 서기석
-영안실에서
땡볕이 내리쬐는
논과 밭 오가시다
벌겋게 달아오른
육신은 무르익어
시분柹粉을
곱게 바르고
누워 계신 어머니
♧ 기도 - 정준원
염천의 삼배고두
비 오듯 흐르는 땀
위태로운 세상살이
빌 것이 하도 많아
오만을 던져버리고
발가벗은 나를 본다
* 「우리詩」9월호 ‘시조특집’에서
사진 - 어제 세미오름에서 찍은 가을꽃들 : 왕고들빼기, 물봉선, 으아리, 이질풀,
쥐꼬리망초, 여우팥, 싸리, 가시엉겅퀴, 주홍서나물, 털이슬(차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