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우리詩' 9월호의 시조

김창집 2017. 9. 9. 08:22



숲에 앉아 - 조병기

 

숲길을 가다가 문득

뻐꾸기 소리 듣는다

 

몇 해 만인가 뻐꾹 뻐꾹

보리누름에 찾아온 새

 

찔레꽃 하얀 향기

누님 생각 절절하다

 

건너 산 꿩이 울고

꾀꼴새 오락가락

떠났던 새들 돌아오니

얼마나 큰 축복이랴

 

어린 적 고향 마을도

눈 아래 와 있느니

    


 

 

음지론- 권갑하

 

오로지 한 뜻으로 빳빳이 결기를 세운,

햇살이지척이래도 한 발짝도 떼지 않는

 

나무도 그늘을 품어야

한 세상을 버티느니

 

외로움을 견뎌내야 마침내 오를 수 있는,

일생 음지만 걸어온 대시인의 자존인 양

 

아프게 가슴 헤집는

서늘한 한 줄의 문장

 

봐주지 않는다고 함부로 핀 꽃 있더냐

들어주는 이 없어도 연주는 계속되고

 

적자赤子의 귀가 길에도

불 밝히는 환한 웃음

    


 

 

민무늬 도배지 - 김삼환

 

희고 검은 얼룩을 한꺼번에 벗겨내자

벽지 속에 숨어 있다 모습을 드러내는

비겁한 그날의 습관 내 오욕의 그림자들

 

비화가 숨어 있는 벽 앞에 서서 보니

초벌 바른 도배지에 묻어나는 부끄러움

민무늬 색지를 골라 마른 벽을 덧바른다

    


 

 

지구별 - 나병춘

 

지구별 한 덩이

구르고 굴러서

 

달무리 별무리 은하와 더불어

 

이윽고, 여기 도착하다

해 뜨는 아침

    


 

 

일기예보 - 김종호

 

장마철 오락가락

빗나가는 일기예보

 

언제쯤 쾌청한 날에

산들바람 분다 할지

 

요즈음 종잡을 수 없는

갱년기의 여인 같아.

    


 

 

생인손 - 김영주

 

주인을 잘 못 만나 숨도 크게 못 쉬어본

짓다 만 말씀의 절[]

애물로 처박혔다

비겁을 뒤집어 쓴 채 시절 눈치 보고 있다

 

긴 날을 끌어안고 애면글면 속 끓이다

품을 수도 없으면서 놔주지도 못하는

살 속을 파고드는 살

아파도 넌 내 새끼

    


 

 

노송老松의 설법說法 - 류안

 

바람이 세차면 바위를 부여잡고

햇살이 따가우면 속으로 파고들어

 

세상이

그런갑다 저런갑다

따지지도 않았다

 

눈이 오면 움츠리고 비가 오면 추스르고

굽히라면 굽혀지고 웃으라면 웃다 보니

 

하늘에

뿌리 내리며

사는 법을 알았다

 

    

 

곶감 2 - 서기석

     -영안실에서

 

땡볕이 내리쬐는

논과 밭 오가시다

 

벌겋게 달아오른

육신은 무르익어

 

시분柹粉

곱게 바르고

누워 계신 어머니

    


 

 

기도 - 정준원

 

염천의 삼배고두

비 오듯 흐르는 땀

 

위태로운 세상살이

빌 것이 하도 많아

 

오만을 던져버리고

발가벗은 나를 본다

 

 

* 우리9월호 시조특집에서

   사진 - 어제 세미오름에서 찍은 가을꽃들 : 왕고들빼기, 물봉선, 으아리, 이질풀,

             쥐꼬리망초, 여우팥, 싸리, 가시엉겅퀴, 주홍서나물, 털이슬(차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