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 10월호의 시
[주요 목차]
*권두 에세이 | 유진
*신작시 32인 選 | 조병기 오현정 주경림 김성중 김미외 이시백 민문자 김세형 조경진
조성순 지소영 유정자 남정화 박동남 이기헌 이종섶 남대희 성숙옥 오명현
이 령 조봉익 조송이 김명옥 김혜천 송정민 홍성재 전선용 양미경 박선희
장옥경 김수현 장정순
*기획연재 인물詩 | 이인평 *신작 소시집 | 정병성
*테마 소시집 | 나병춘 *임보의 연시집 일역 | 고정애
*여름시인학교 백일장 수상작 | 이상욱 이나라 리상훈 전정희 박원혜
*신작 소시집 시평 | 임채우 *나의 시 한 편 | 이송희
*나의 애송시 | 마선숙 *한시한담 | 조영임
♧ [권두시]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1913~1975), 「가을의 기도」 전문.
♧ 사는 일 - 조병기
한번 태어났으니
한 번쯤은 살아 볼 만하지
애석해 하지도 말고
괴롭다 말하지도 말고
한 번쯤은 속아볼 만하지
그냥 그렇게
흔들리고 휘청거리다 보면
미움이 용서인 것을
어머니 말씀 가운데
일등도 말고 이삼등쯤으로
해 지고 나면 달이 뜨겠지
달 지고 나면 해가 뜨겠지
♧ 먼 먼 아주 먼 - 김미외
어슴푸레하게 합수머리가 보입니다
허우룩하게 흘러가는 내 걸음과
성큼성큼 흘러가는 당신의 걸음이
합수머리를 향해 종종 걸음을 칩니다
옛날 옛적
아주 까마득한 옛날 옛적에
어쩌면 우리는 빗방울이었나 봅니다
보고픔으로 깨끔발 뛰며
만나자한 기억은 없지만
비꽃*으로 산돌림*으로 내려
저 합수머리에서 하나 되어
꽃가람*으로 흐르려 하니까요
먼 먼 아주 먼 훗날
꿀비가 된 빗방울의 우리는
또 다시 합수머리에서 만나
이대로 나비잠을 자자고
이대로 바다가 되자며
손을 잡겠지요
먼 먼 아주 멀고도 먼
먼 먼 아주 멀고도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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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꽃 : 비가 시작될 때 몇 방울 떨어지는 비.
* 산돌림 : 옮겨 다니면서 내리는 비.
* 꽃가람 : 꽃이 있는 강을 뜻하는 순 우리 말.
♧ 척으로 - 조성순
몰라도 아는 척
없어도 있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척으로 70여년
지난 허상의 세월
이젠
알아도 모른 척
있어도 없는 척
잘나도 못난 척
겸허히 받아들일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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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 : 물로 좋은 일로 끌림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그 흔적은 좋지 못한 척이 훨씬 많은 것 같다.
♧ 코스모스 - 이기헌
풍성하게 피어나지는 않지만
가슴 저미듯 꽃잎을 흔들어댄다
화려하게 꽃피우지는 않지만
바람의 무등을 타고 넘실거린다
행복에 겨운 몸부림은 아니지만
애틋한 그리움에 나풀거린다
그대 곁에 한 시절 머물고 싶다
♧ 자화상 - 남대희
파란 하늘 조각구름들
다도해 작은 섬들이라면
여기 나는 작은 돌고래
몰래 숨긴 슬픔 분수같이 토해내는
진화하지 못한 포유류
억만 년 원죄를 어쩌지 못하는
아가미도 없는 물고기
힘찬 유영으로도 닿지 못하는
본능의 대륙붕 너머 마른 모래톱
비늘을 털어내고 지느러미를 잘라내고
뭍으로 기어오를 그 날에
선혈처럼 선명할 붉은 해당화
♧ 아버지의 서체본書體本 - 오명현
뒷방에 들어앉은 병신년생 아들에게
밥상머리에서 말씀하셨다
달래 병신이라냐
병들 病자 몸 身자
육신에 병이 들면 병신이란다
꼭꼭 눌러서 내 몸에 새기신
아버지의 해서체
당신에게도 그렇게 채찍을 드셨던 것
♧ 도리사 연등 아래서 - 김명옥
아도화상 앞에 촛불공양 올리고
소원 많은 이승
소원 없게 해 달라고
두 손 모은다
금이 간 하늘에는
오색 소원들이
꼬리를 치며 흔들거리고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도 덩달아 흔들거린다
당기면 될 걸
밀려고만 했던 여러 문들,
빗장 풀리는 소리 들려온다
*「우리詩」10월호(통권 352호)에서
사진은 요즘 한창 피어오르는 왕고들빼기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