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우리詩' 10월호의 시

김창집 2017. 9. 30. 23:42



[주요 목차]

 

*권두 에세이 | 유진

*신작시 32| 조병기 오현정 주경림 김성중 김미외 이시백 민문자 김세형 조경진

                조성순 지소영 유정자 남정화 박동남 이기헌 이종섶 남대희 성숙옥 오명현

                이   령 조봉익 조송이 김명옥 김혜천 송정민 홍성재 전선용 양미경 박선희

                장옥경 김수현 장정순

*기획연재 인물| 이인평 *신작 소시집 | 정병성

*테마 소시집 | 나병춘 *임보의 연시집 일역 | 고정애

*여름시인학교 백일장 수상작 | 이상욱 이나라 리상훈 전정희 박원혜

*신작 소시집 시평 | 임채우 *나의 시 한 편 | 이송희

*나의 애송시 | 마선숙 *한시한담 | 조영임

   

   

[권두시]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1913~1975), 가을의 기도전문.

 

 

 

사는 일 - 조병기

 

한번 태어났으니

한 번쯤은 살아 볼 만하지

 

애석해 하지도 말고

괴롭다 말하지도 말고

 

한 번쯤은 속아볼 만하지

그냥 그렇게

 

흔들리고 휘청거리다 보면

미움이 용서인 것을

 

어머니 말씀 가운데

일등도 말고 이삼등쯤으로

 

해 지고 나면 달이 뜨겠지

달 지고 나면 해가 뜨겠지

 


 

 

먼 먼 아주 먼 - 김미외

 

어슴푸레하게 합수머리가 보입니다

허우룩하게 흘러가는 내 걸음과

성큼성큼 흘러가는 당신의 걸음이

합수머리를 향해 종종 걸음을 칩니다

옛날 옛적

아주 까마득한 옛날 옛적에

어쩌면 우리는 빗방울이었나 봅니다

보고픔으로 깨끔발 뛰며

만나자한 기억은 없지만

비꽃*으로 산돌림*으로 내려

저 합수머리에서 하나 되어

꽃가람*으로 흐르려 하니까요

먼 먼 아주 먼 훗날

꿀비가 된 빗방울의 우리는

또 다시 합수머리에서 만나

이대로 나비잠을 자자고

이대로 바다가 되자며

손을 잡겠지요

먼 먼 아주 멀고도 먼

먼 먼 아주 멀고도 먼

 

---

 

* 비꽃 : 비가 시작될 때 몇 방울 떨어지는 비.

* 산돌림 : 옮겨 다니면서 내리는 비.

* 꽃가람 : 꽃이 있는 강을 뜻하는 순 우리 말.

 

 

 

척으로 - 조성순

 

몰라도 아는 척

없어도 있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척으로 70여년

지난 허상의 세월

 

이젠

 

알아도 모른 척

있어도 없는 척

잘나도 못난 척

 

겸허히 받아들일 세월

 

---

* : 물로 좋은 일로 끌림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그 흔적은 좋지 못한 척이 훨씬 많은 것 같다.

 

 

 

코스모스 - 이기헌

 

풍성하게 피어나지는 않지만

가슴 저미듯 꽃잎을 흔들어댄다

화려하게 꽃피우지는 않지만

바람의 무등을 타고 넘실거린다

행복에 겨운 몸부림은 아니지만

애틋한 그리움에 나풀거린다

 

그대 곁에 한 시절 머물고 싶다

 


 

 

자화상 - 남대희

 

파란 하늘 조각구름들

다도해 작은 섬들이라면

여기 나는 작은 돌고래

몰래 숨긴 슬픔 분수같이 토해내는

진화하지 못한 포유류

억만 년 원죄를 어쩌지 못하는

아가미도 없는 물고기

힘찬 유영으로도 닿지 못하는

본능의 대륙붕 너머 마른 모래톱

비늘을 털어내고 지느러미를 잘라내고

뭍으로 기어오를 그 날에

선혈처럼 선명할 붉은 해당화

 


 

 

아버지의 서체본書體本 - 오명현

 

뒷방에 들어앉은 병신년생 아들에게

밥상머리에서 말씀하셨다

 

달래 병신이라냐

병들 자 몸

육신에 병이 들면 병신이란다

 

꼭꼭 눌러서 내 몸에 새기신

아버지의 해서체

 

당신에게도 그렇게 채찍을 드셨던 것

 


 

 

도리사 연등 아래서 - 김명옥

 

아도화상 앞에 촛불공양 올리고

소원 많은 이승

소원 없게 해 달라고

두 손 모은다

 

금이 간 하늘에는

오색 소원들이

꼬리를 치며 흔들거리고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도 덩달아 흔들거린다

 

당기면 될 걸

밀려고만 했던 여러 문들,

빗장 풀리는 소리 들려온다

 

 

     *우리10월호(통권 352)에서

        사진은 요즘 한창 피어오르는 왕고들빼기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