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국 시인의 가을 詩
♧ 시월에
시월엔 나무가 되랴
그 성그는 숲으로 가랴
물빛 하늘 우러러
낙엽을 준비하고
노을에 산창을 열고
저녁 불도
지피랴.
♧ 들국
혼자 들국을 보면
사람 냄새가
꽃에서 난다
갓 露宿(노숙)에 길들여진
가출 소년 소녀들처럼
저들도
말 한 마디씩은
참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 코스모스
시골길 아가씨들이
과소비에
한 술 더 뜬다
춥거니 섧거니 하며
온갖 내숭 다 떨더니만
일간지
일면에 피어
칼라
칼라
흔
들
고
있다.
♧ 나팔꽃
반시계 방향을 돌면
네가 섬길
하늘이 있다
힘겨운 목덜미 너머
죄인조차
반기는
아침
뒤틀린
지상의 넋들이
따로
꽃을
준비하는.
♧ 호박꽃
딱 하나
그 꽃 앞에선
내 낯이 먼저
붉어진다
무심결
오줌을 누다
담장 너머
들킨 후부터
날 보면
없었던 일처럼
부러
부러
하품만
한다.
♧ 맨드라미
꽃이여,
네 혈관 속에
집시의 피가
흐르고
있지
낮술에 혀 꼬부라진
어릿광대
悖說(패설)이 있지
올가을
거리를 뜨는
늙은 酌婦(작부)의
눈물이
있지.
♧ 晩秋의 詩
1
마침내 이 지상의 여론조사는 끝이 났다
아성의 박수소리 담장너머 뜸해지고
하나 둘 임시정부의 깃발들을 내리나니,
2
하냥 그 산기슭의 가건물은 허물어져
방방곡곡 내로라는 사기도박꾼도 다 뜬 지금
빛바랜 장풍껍데기만 식은 바닥에 어지럽고….
3
쓸쓸히 낮달이 혼자 젖은 내프킨 입에 물고
부러진 목제사다리를 간신, 간신히 내려와선
이제 막 내 지문에 묻은 도장밥을 닦으라 한다.
*고정국 시조선집 ‘개망초 마을의 풍경’(토방, 199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