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작가의 가을시편
♧ 들국 - 고정국
혼자 들국을 보면
사람 냄새가
꽃에서 난다
갓 露宿(노숙)에 길들여진
가출 소년 소녀들처럼
저들도
말 한 마디씩은
참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 가을 낙엽 - 김광렬
가을엔 온통 가을을 불 지르다가
낙엽이 되리라
나를 나뭇가지에서 사뿐히 내려놓으리라
바람에 휩쓸려 어디론가 아득히 멀어져가리라
그래, 잘 가라고 손 흔들지 말라
세월이 불타는 정거장에 서서
사뭇 마음 아프다는 듯 눈물짓지 말라
이 세상 사랑하듯
이 한 계절 소름 끼치도록 열애하다가
떠나가는 일은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미련을 남기는 일은 얼마나 치욕인가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다는 징표인가
유년을 보내고 푸른 청년 시절을 보내고
노을 지는 문턱에 서서
나도 한때 불타는 시절을 보냈다고
숱한 시간들을 서성였다고
회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
내가 사라져가는 쪽을 향해 손 흔들지 말라
망설임 없이 떠나가는 것들이 눈부시다
♧ 단풍 - 김수열
이른 봄에 태어나
천둥벼락에 오소소소 치떨다가
비바람에 때깔 벗고
이제 사는가 싶더니 울긋불긋 가을이다
남부럽잖은 호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저렇게 좋아할 리 없다
♧ 물매화 - 문영종
물~매화 하고 읊조리니 여린 개울물처럼 흘러간다. 흘러가는 물에 꽃들이 떠가는 게 보인다. 가는 바람에도 흔들거리며 눈물을 쏟아낼 것 같고, 이별하는 이를 위해 눈물을 오래 삭히며 간직한 연인 같은 꽃을 용눈이오름에서 만났다.
눈물을 보이지 않고 돌아설 수 있을 것 같은 꽃
보고 싶어도 눈물을 안으로 삼키며 향기를 내는 꽃이 여기 있다
♧ 절굿대 - 김순남
그대가 부르지 않아도
나는 그대에게로 간다
담벼락에 펄펄 뛰는 맥박이
순하게 바늘가시로 돋는
꽃송이를 위하여
다랑쉬 숨가쁜 언덕이나
족은드레왓, 허허로운 벌판 어디쯤
그대의 앵글 속에 갇히고 싶다
눈뜨고 바라보면 흔들리는 세상도
지그시 반쪽 눈 닫고 바라보면
어찌 알았으랴
어느 간이역과 마주친 온갖
실망과 분노와 멸시마저도
청보라 깊은 색칠로
단꿈 피워 얹어 놓을 줄을.
♧ 어제 내린 가을비 - 양영길
어제 내린 가을비에서
바다 냄새가 났어
오랜 시간들을 뒤척이고 있었지
물새들이 막 내려앉았어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 몰려가듯이
꽃비가 쏟아져 흘러가듯이
밤새 별들이 쏟아졌을까
바다가
바다가 노란 색이었어
노란 은행잎에 뒤덮여 있었어
맨몸으로 가을비에 젖은 은행나무에서
바닷새가 파닥이는 소리가 들렸어
파도소리가 묻어있는 가을비가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어
너의 창문을 적시고 있었어
♧ 올레길 연가 5 - 오영호
너와 나 흘린 땀이
길바닥에 나뒹굴 때
살며시 손을 잡는 보랏빛 순비기꽃
달콤한 그 향기 속에
또 하나의 나를 본다.
산을 베고 누운 청명한 가을 하늘이
빚어낸 에메랄드 빛
너울대는 바다를 보면
때때로 시린 무릎도
혈기 펄펄 솟는다.
♧ 꽃향유 - 한희정
산중턱 일렁일렁
가을이 흔들며
오네
단풍 산 새털구름
친구 떠난
길을
두고
넌지시 바람에 눕네,
지등 가만 밝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