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역류를 꿈꾸다'에서
* 참회나무
♧ 흑룡만리* - 홍성운
누군가 그리워 만 리 돌담을 쌓고
참아도 쉬 터지는 이 봄날 아지랑이 같은
울 할망 흘린 오름에
눈물이 괸 들꽃들
차마 섬을 두고 하늘 오르지 못한다
그 옛날 불씨 지펴 내 몸 빚던 손길들
목 맑은 휘파람새가
톺아보며 호명하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한뎃잠을 자야한다
그래서 일출봉에 마음은 가 있지만
방목된 저녁노을이
시린 발을 당긴다
섬에 가두어진 게 어디 우마뿐이랴
중산간의 잣성도, 낙인된 봉분들도
먼 왕조 출륙금지령으로
그렇게 눌러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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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만리 : 제주의 현무암 돌담을 아우르는 말.
*까마귀밥여름나무
♧ 내설악에서 길을 잃다 - 정성욱
내설악에 눈 내리면 한 폭 수묵화가 된다.
고고해지기 위해서 길이란 길 모두 덮고
존재의 길을 지우듯 쏟아지는 저 폭설.
누가 저 산사에 흰 수(繡)를 놓는 건가.
적설의 계곡에서 아찔하게 헛디디면
오로지 은사시나무 잎만 바람에 흔들리느니.
몸 지쳐 고개 드니 둥그렇게 떠 있는 달
무시로 몸속에서 얼음꽃이 피어나고
한 번쯤 폭설 속에서 헤매는 것도 生임을 알았다.
*산딸나무
♧ 아버지가 서 계시네 - 이종문
순애야~ 날 부르는 쩌렁쩌렁 고함소리
무심코 내다보니 대운동장 한복판에
쌀 한 말 짊어지고 아버지가 서 계셨다
어구야꾸 쏟아지는 싸락눈을 맞으시며
새끼대이 멜빵으로 쌀 한 말 짊어지고
순애야~ 순애 어딧노? 외치시는 것이었다
너무도 황당하고 또 하도나 부끄러워
모른 척 엎드렸는데 드르륵 문을 열고
쌀 한 말 지신 아버지 우리 반에 나타났다
순애야, 니는 대체 대답을 와 안하노?
대구에 오는 김에 쌀 한말 지고 왔다
이 쌀밥 묵은 힘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래
하시던 그 아버지 무덤 속에 계시는데
싸락눈 내리시네, 흰 쌀밥 같은 눈이
쌀 한 말 짊어지고 아버지가 서 계시네
*야광나무
♧ 가을 풀밭 - 이요섭
가을엔 풀밭이 운다.
벌레들도 성토한다.
풀씨만한 소리들이
수천 개 모여들어
오염된 세상을 안고
밤새고 울어댄다.
무성한 황무지의
가을은 구슬프다.
누구도 볼 수 없는
벌레의 마을 안엔
너절한 주검 앞에서
가을밤은 울고 있다.
*섬매발톱
♧ 모래가 되다 - 우은숙
무릎 접은 낙타의 겸손에 올라타고
둥근 가슴 몇을 지나 사구砂丘에 도착한 순간
시뻘건 불덩이로 넘는 사막의 꽃을 본다
설렘은 떨림으로, 떨림은 두근거림으로
고요마저 삼켜버린 핼쑥한 지구 한 켠
응고된 지난 죄목들 모래 위에 뒹군다
나는 고해성사하는 신자처럼 엎드려
흠집 난 내 영혼을 달래 줄 사막에서
모래와 하나가 된다, 한 알의 모래가 된다
*말오줌때
♧ 새, 둥지를 떠나다 - 신양란
싫어서가 아니라 익숙해서 떠납니다.
쥔 것을 놓지 않고는 새 것을 잡을 수 없어서, 항구에 정박한 채로는 바다를 건널 수 없어서, 놓고 끊고 버리고 일단 떠나기로 합니다. 이 둥지의 평화로움이 그리워질 때 있겠지만, 애틋한 인연 떠올라 흔들리는 날 있겠지만, 놓고 끊고 버린 까닭을 잊지 않겠습니다. 꽃그늘을 버리고 매운바람 속으로 갑니다. 볼품없는 날개로 붕새의 꿈을 꿉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깨지는 시간을 다 견딘 뒤, 어리석은 오늘의 선택을 자랑하겠습니다.
싫어서 떠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궁금해 떠납니다.
*죽절초
♧ 설일雪日 - 박현덕
―화순 개천사
저만치 눈이 온다 온 산을 작신 때려
나무들 뼈만 남아 흐득흐득 뒤척이고
산새의 울음도 끊겼나, 살 베는 폭설이다
마음이 비워지듯 길이란 길 다 사라져
사십구제 마치고 절 마당에 나온 식솔
더 깊게 쌓이는 적막, 껴안으려 팔 내민다
대웅전 앞 고목에 희끗희끗 붙은 눈
문드러진 살결에 소리 없이 숨결 넣어
슬픔의 뼈마디마다 큰 새가 날아오른다
*낙상홍
♧ 구름집에서 - 박정호
선혈인 양 쏟아놓은 백일홍 그늘 아래 놓인 앞길 디딘 뒷길 밟히는 그 꽃잎을 벗어둔 그림자 하나 외면하며 무심한 때. 가고 오고 오고 가고 그려 그려 천 리 만 리, 눈물도 회한도 없이 피고 지고 지고 피고, 손길이 닿지 않아도 그려 그려, 그런 것을. 꽃 피어 꽃 지는 일이 일도 없이 버거워라 파랑 일어 적시는 생각 없는 심중에 길 잃은 세간의 나비 청산에 갇혔네.
*찔레나무
♧ 물푸레나무 떠나다 - 나순옥
천성이 헐렁한 주제에 넘보기는 뭘 넘봐
처음부터 그 자리는 내 설 곳이 아니었나
솔밭에 함께 산다는 것 끝없는 고문이었어
얼굴 넓은 촌뜨기 사계절 변덕부린다며
때때로 내려 찌르는 매서운 손끝이며
샛노란 송화 가루 풍겨 숨통을 조이던 일…
그보다 더 큰 폭력은 항상 푸른 낯빛이야
철저한 표정관리 목이 곧은 귀족들
이기심 날 세워 두르고 틈을 주지 않았어
*굴거리나무
♧ 차가운 별 - 김수엽
세상이 눅눅해서 두렵고 아팠을 거야
가난을 구겨 넣은 반 지하의 그 어둠
한 뼘 창
햇볕이 와서
똑똑 거리는 한낮인데
젊음도 녹이 슬고
사람 냄새 더 그리운데
세 모녀를 지켜보는 네 벽은 검은 곰팡이뿐
차라리
손때 긴 세상
내려놓고 떠날 수밖에
저 공평한 별조차
자기 것이 아니었네
방값을 챙겨두고 간 이 넓고 빛나는 사랑
그 곁에
사람 소리가
퉁퉁 부어 아픈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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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20일 서울 송파구 세 모녀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매발톱나무
♧ 바다 앞에만 서면 - 김삼환
햇볕이 날아가다 푸른 바다에 빠져서
빠져서 물에 젖은 그 마음이 멍들어
멍들어 아픈 바다를 안고 오는 저녁노을
저녁노을 끌고 오다 목이 메는 저 바다에
저 바다에 잠든 아이들 잊지 않는 갯바람
갯바람 몸에 감고서 날아가는 그날 햇볕
*작살나무
♧ 담쟁이 - 권갑하
삶은,
가파른 벽을
온몸으로 오르는 것
무성한
잎을 드리워
속내를 숨기는 것
비워도
돋는 슬픔은
벽화로 그려낼 뿐
* 마가목
♧ 기도실 - 강현덕
울려고 갔다가
울지 못한 날 있었다
앞서 온 슬픔에
내 슬픔은 밀려나고
그 여자
들썩이던 어깨에
내 눈물까지 주고 온 날
* 역류 20주년 기념집 『다시, 역류를 꿈꾸다』 (알토란북스, 2017)에서
* 사진 : 가을 열매
* 남오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