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문학' 제30집의 시와 억새
당신이 더듬거리며 말해주는 개인적인 이야기, 느리고 서툰 개인풍의 자장가는 신화로 재탄생 됩니다. 시대는 바뀌지만 신화는 소설과 시로 진화하여 당신이라는, 불멸의 이름을 갖습니다. 시간이 공간과 교집합을 이룬 바로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찾아오신 당신, 우연이 아닌 당신의 발밑에서 당신은 가볍고 느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는 글’에서
♧ 꽃이 피는 이유 - 김병심
제 새끼 세상 빛 보이려고
꽃은
형형색색 화장을 하고
이 벌 저 나비에게
술을 따른다
꽃보다
꽃이 피는 이유가
더 아름답다
♧ 안개 주의 - 김정희
한라산 넘어 가는 길 삼거리에 차를 멈추었다
안개 주의
빨간 불 쳐다보다가
소나무가 신호등 앞에서 망서린 듯
분재처럼 꼬부라진 가지 길 밖 하늘을 향해 뻗어있다
신호등을 자르거나 치워버릴 수도 없다
한참을 생각하고 난 소나무는
신호등 안쪽이 아닌 바깥쪽으로 가지를 뻗기로 한 것이다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게 쉬운 일 아니다
삼거리에서 혼란스러
처음 자신을 돌아보면 길은 의외로 빨리 잘 보일 수 있다
♧ 천식 - 송상
개가 목에서 강아지풀을 뜯는다.
숨 가쁜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거꾸로 정신을 세운다.
주워 담기만 해온 내 연혁들
안간힘을 쓸수록
목에 날카로운 통점을 내어왔지.
버리고 또 버려야
푸른 노래를 펼칠 수 있을는지.
오래도록 이물질에 지친 목구멍에
가래가 거미줄을 친다.
내가 걸려든다.
조여 오는 거미의 쌕쌕이는 소리
섬모가 하얗게 질린다.
♧ 오라동 메꽃 - 양전형
처음에는 인기척인가만 했다
그러나 꽃의 나팔음은
바삐 가는 경운기 소리보다 높다
얼어 죽을 놈의 세상이라던
그래도 술이 있어
세상은 곰팡이 슬지 않는다던 김총각,
간암으로 입 다물며 떠난 지 여남은 해
검붉은 코피 쏟으며
은밀한 치부 보일 듯 말 듯
씨팔, 씨팔, 하며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맴돌던 마을길 도랑가에
그는 여태 기어다니다
저승 십년을 꽃으로 왈칵왈칵 토했다
그해 여름처럼 기특한 까마귀
낯익은 얼굴을 부른다
김총각, 꽃줄기로 떼어진 숨결 기워 내더니
아직 얼어 죽지 않는 세상을 본다
♧ 기괴한 자장가 - 오광석
머리 둘 달린 아이가 낫을 들고 다닌대 달 없는 밤마다 골목 구석구석 다닌대 어느 집 창문을 넘어 들어가 잠든 아이들의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는데 밤마다 아이들이 잠들면 어깨어림에서 불쑥불쑥 머리가 새로 자라는데 아이들은 새로 자라나는 머리가 꾸는 기괴한 꿈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데 머리 둘 달린 아이는 자라나는 아이의 다른 머리를 싹둑 하고 잘라 낸대 아이들이 편안한 얼굴로 잠속으로 빠져들면 머리 둘 달린 아이는 휴우 한숨으로 일을 마치고 다시 창문 너머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지는데 자기 머리 하나는 스스로 자르지 못해 기괴한 꿈속을 헤맬까 잠들지 못하고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노래를 부른대 달 없는 밤마다 아이가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면 어른들은 무서워 문을 꼭꼭 잠그는데 아이들은 자장가로 들리는지 새근새근 잠이 든대
♧ 옥상에서 - 이윤승
말갛게 씻은 하늘 한 장 옥상에 널었다
꼬들꼬들 잘 마른 햇살 몇 섬 수직으로 꽂혔다
잡힐 듯 부드러운 바람의 감촉
꽃이 되고 싶은 동동 떠다니는 씨앗
새들의 음계를 비명으로 읽는다
솜사탕 구름 몇 조각 덤이다
지붕 나무 산들의 꼭대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높은 곳은 오르고 싶다
내 안에 내장된 오랜 습성 때문이다
꼭대기에 가볍게 착지한 깃털이 있단다
꼭대기는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것이라고
눈 맑은 새가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골목길이 골짜기가 된다
물길 되어 흐른다
옆집 미용실 아들의 취직 명퇴한 정씨의 재취업, 내 집 장만의 꿈 다 이 길로 흘러들어 왔다
방향이 같은 곳으로 흐르는 골목들
♧ 꽃 - 조선희
단풍이 한창인데
꽃놀이 나선 어머니의 머리에 하얀 입김이 서린다
숙여진 허리 펴보며 주름진 얼굴에 고운 자태
신발 속에 무에 그리 들었나
한발이 무섭구나
지팡이 된 팔뚝은 어깨마저 내려앉고
어머니의 삶이 실려있는 듯
다리가 휘청거린다
기억의 바다를 건너다
새소리에 돌아보니 꽃물 든 소녀가
가만 손을 잡고 있다
*한라산문학 제30집
‘우주를 체험한 문장가에게’(한라산문학동인회, 201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