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문학'이 만난 문인 - 김금용
『산림문학』2017년 겨울호(통권28호)는
‘산림문학이 만난 문인’으로 김금용 시인을 모셨다.
김금용 시인은
1997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으로
‘광화문 자콥’, ‘넘치는 그늘’
‘핏줄은 따스하다, 아프다’ 등이 있다.
♧ 여인목*
수만 개의 푸른 가시 위로 아침 햇살이 침을 삼킨다
한낮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가시 위로 뛰어내리는
발장난치는 햇살 때문에 가시마다 젖물이 돈다
덜 깬 눈빛으로 얼굴 내미는 홀 떡잎
고통에 못 이겨 입술을 빼물면서도
웃음부터 배시시 내밀고 선
가시 위에 맨발로 티토하고 선
여인목, 너는 발레리나
내치지마라
마른 모래바람인들 무엇이 두려울까
네 가시 치마폭을 펼치면
갈증의 사막이 걸어 들어올 것을
혓바늘 돋은 까칠한 땡볕을 머리에 이고
차라리 춤을 추자
백 만 가시가 찌르면 찌를수록
새빨갛게 타오르는 너의 심연
늑대의 젖을 빨며 저 몽고 벌판
북두칠성 따라 길을 나선
어머니의 어머니
색色으로 공空으로
제 혼자 탯줄을 잘라내는
너, 여인목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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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목 : 선인장의 하나.
♧ 동충하초冬蟲夏草
사천 미터 만년설산을 날아오르기엔 내 여린 날개는 턱없이 약해요
유월에도 내리는 함박눈이 내 체온을 뺏어가요
부족한 산소와 추위 때문에 숨쉴 수가 없어요
버들강아지든 쥐방울덩굴이든 뿌리 속에 기어들어가 눕고 싶어요
내 몸이 숙주가 되어 꽃이 피니 내 사랑 그대와 한 몸이네요
산제사로 바쳐져 감지 못한 내 두 눈은 그대의 눈이 되고
숨기지 못한 내 꼬리는 사랑에 부푼 풀잎인 양 춤을 추네요
내가 꼬리명주나비인 걸 야크는 알겠죠
처절한 공생이니깐요 지독한 사랑이니깐요
♧ 들꽃
검은 석탄재가 검은 내로 흐르는 태백 광산촌
하루치 일용할 양식을 캐는 광부 손에 이끌려
수 천 년 어둠 속에서 참고 눌러온 숨을 터뜨린다
어둡고 긴 가난한 역사만큼
제 안의 빛과 색과 모양을 드러내는 꽃들
황금빛이 번뜩이는 금운모 석영으로
빙어 떼가 엉켜 붙은 방해석으로
초록 비취색 공작석과 홍시빛 홍아연석으로
검은 돌 틈에 박힌 새끼손톱만한 빨간 루비로
영원히 꿈꾸고 싶은 사랑의 이름으로
부활하는 돌꽃
♧ 현무암 돌하르방
화산 폭발로 시뻘건 불덩이를 쏟아낼 때
한라산 현무암은 눈 뜬 채 숨이 멎었나 보다
동그랗게 놀란 눈동자가 돌멩이마다 가득하다
자국을 가만가만 쓰다듬다 보면
잠들지 못한 작은 구멍마다 전생의 모습이 보인다
거북이 등 위에 올라앉은 맹꽁이가 보인다 곰보 할아버지 얼굴이 보인다 엄지 하나 콧등에 세운 코뿔소도 보인다 주먹다짐에도 웃기만 하던 병구아저씨 얼굴도 보인다 뭍으로 나간 자식 걱정에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던 어머니, 돌무더기 너머로 먹장구름이 놀다 가고 새벽 별도 귀 열고 듣다 잠드는 게 보인다 눈 감지 못하고 귀 닫지 못한 채 거친 제주바람을 지키는 돌하르방 아버지도 보인다
♧ 동거인 벤자민
낯설다, 그의 손이 닿는 것이 새삼스럽다
언제부터인가
한 집에 동거하면서도 남남인 물상,
각자의 자리에서 독립을 기뻐하며
각자 창밖을 바라보는 여유에 감사해하며
마음이 부대껴도 친구에게 먼저 등 돌아가는
상남자가 되버린 그의 큰 키,
흠칫 놀라 그의 중심 잡힌 몸매를 쳐다본다
살집이 올라 두툼해지고
줄기 마디마디엔 주름이 깊어졌다
빛과 색이 살아 움직이는 벤자민 나무
잡고 잡힌 줄기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전류
굳이 말을 주고받을 것도 없이
내가 올려다보면
긴 복도의 그림자까지 겹쳐 찡긋 내 팔을 잡는다
푸르고 싱싱한 그의 냄새가 집안에 가득 번진다
기다려줘 고맙다고
오늘은 못이기는 척 그의 팔에 안겨볼까,
벤자민 나무와 나는 동거인,
내 사랑을 많이 닮았다
♧ 과꽃
-고구려의 바람 11
조선족 명성마을에 과꽃이 피었습니다.
모국 사람들 온다고 길 다지다 말고
과꽃이 되어 목 빼고 손 흔듭니다
말이 통하는 동포 온다고
조선족 할머니 할아버지 과꽃이 되었습니다.
색색의 한복을 차려입고 과꽃이 되었습니다.
가마솥으로 찐 옥수수에 고구마를 건네며
굵은 주름그늘을 만들며 눈웃음 터뜨립니다
고추며 가지 상추를 심어놓은 울안 텃밭에도
무심한 백 년의 두만강을 건너 뛴 고향 햇살이 넘칩니다.
눈길만 던져도 푸른 물이 돋는 가을 하늘 아래
국적은 중국이지만 한국어로 명성촌이라고 써놓은
이정표 앞에 과꽃이 사무치게 붉고 맑습니다
고구려 때부터 백 여 년 지켜온 조선족 집성촌에
초가을 햇살까지 과꽃인 양
버스가 떠난 뒤에도 제 색에 겨워 출렁입니다.
♧ 전사의 발바닥
언제 갓 태어난 아기의 발바닥을 보았던가
희고 매끄러운 탄성
핏줄 환히 들여다보이는 처녀지
주름 한 줄 없다
그늘 하나 없다
다섯 개 발가락마다 말간 핏줄거울 달고
지구별로 날아든 새 생명,
거대한 코끼리 발바닥보다 야무지다
한 개인사가 가족의 울타리가
저 주먹 쥐고 내뻗는 발힘으로
첫사랑, 첫 설렘으로
새 역사를 내딛고 있다
*『산림문학』2017년 겨울호(통권28호)에서
사진은 요즘 씨앗을 퍼뜨리려는 박주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