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2월호의 시(3)
♧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 산사 일우 - 김석규
목어 꼬리에 낮달이 졸고 있다
텅빈 적묵의 고무신 파르라니
법당 귀 닳은 섬돌 아래
다소곳이 합장하고 섰는 석탑 그림자
불두화 그늘에 떠내려간다.
흰 구름 흘러가서 또 몇 만 리
굽이 돌아간 저 아래의
잊혀진 인연 하나도 새삼 무거운데
눈썹 아래 연연히 물드는 서쪽
삼천 대천 소리 없이 타고 있다.
♧ 퇴고 - 차영호
사과나무를 전정할 때
주인 손으로 하면 해마다 사과 알이 오목눈이 알처럼 작아져
남에게 맡겨야 한대
아까운 줄 모르고 쳐대야
알이 굵어진다더군
잠자코 서 있던 사과나무 왈曰
시詩도 그래
♧ 달빛을 잡다 - 김수원
달빛이 등을 휜 채
고양이 걸음을 내딛는다
경쾌하게 왈츠를 춘다
손을 잡은 춤사위로
젊음을 소리 없이 잡아챈다
사수좌 같은 발톱으로
시간을 가로지른다
허기로 밤공기를 찢는
고양이 울음이 창문을 비춘다
시간의 붉은 피를 입에 묻힌
달빛을 잡으러
산야를 휘젖고 다녔으나
잡힐 듯 꼬리를 끌며
일출 속으로 사라진다
생애를 움켜쥔 빈주먹을
가만히 펼쳐본다
달빛이 충만하게 차있다.
♧ 그곳이 있다 - 김혜천
대다수 사람들의 평범한 삶으로부터
스스로를 유배 시키고
온 몸으로 시를 쓰는 지진아의 어눌한 언어
정해진 속도로 걷고
계량화된 무게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만 너그러운
음험한 도시,
그 도시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호출한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변명이고 치유이다
바닥바닥 긁던 바닥은 이제 견고한 배경이다
쫒기면서 쫒아가서 일으킨다
소리친다
질펀한 갯벌에 발 담그고 조개를 캐던 시간
돌미역 움켜쥐고 올라 호이호이 내뱉는 가쁜 숨
이유 있다고
바람이 사나워도 파랑이 집채를 삼켜도
저 멀리 이어도, 이어도가 있는 한
지치지 말자고
♧ 나무는 울고 싶을 때 새를 찾는다 - 이범철
주목나무에 눈이 내린다
딱새 한 마리 눈발 속을 날아
주목나무 촘촘한 품으로 찾아든다
주목나무에 딱새는 날아와 울고
나무는 정수리로 눈발을 받고 있다
가슴 붉은딱새 떠난 나무에 울음이 남고
붉게 남아서,
눈 내리는 날에는 나무에게서 딱새 울음소리가 난다
바람 부는 날 높은 나무에 올라 혼자 운 적이 있다
그날 밤, 나무가 밤새 더 크게 우는 걸 들었다
♧ 가장 좋은 말 - 홍해리
-치매행 致梅行 ․ 248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사람 없고
걱정거리 없는 집 없다는 말 있지
그래 너도 힘들지
내가 힘든 만큼 너도 그런데
이걸 가지고 내가 힘들다 해서야
아니야, 고맙지 해야지
이만한 것만도 다행이야
옆을 봐 너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 그래서 사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 월간 '우리詩' 2월호(통권 제356호)에서
* 사진 : 변산바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