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3월호의 시(1)

김창집 2018. 3. 8. 17:27


주요 목차

 

*권두 에세이 |채들

*신작시 20| 임보 변종환 정순영 김두환 강만수 김일곤 한옥순 배교윤 홍인우

   나기창 김세형 민구식 이동훈 라윤형 최한나 정병성 정유광 조성례 이일우 강준모

*신작 소시집 | 윤순호 *테마 소시집 | 마선숙

*연재시 | 홍해리 *추모 특집 | 이재부

*나의 시 한 편 | 차영호 이병금 김완 우정연 전선용

*산문 | 임채우 *한시한담 | 조영임

   

 

 

쥐가오리 - 임보

 

온몸이 넓은 지느러미로 된 가오리는

원래 해저의 펄에 몸을 감추고

플랑크톤을 먹고 사는 조용한 어족이다

 

그런데 쥐가오리는 좀 특이하다

이놈들은 먹이를 찾아 떼로 몰려다니며

수컷들은 수면을 박차고 수 미터 공중을 난다

 

그들이 허공에 떴다 수면에 몸이 부딪힐 때는

물이 튀기면서 대단한 소리를 낸다

그 소리의 크기로 힘을 과시하기도 한다

 

쥐가오리의 활공은 수컷들의 구애 수단

큰 소리 내는 놈을 좇아 암컷들이 모여든다고

어떤 어류학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 이유뿐일까?

그놈들도 물밖 세상이 궁금한 건 아닐까?

허공을 엿보는 수국의 저 가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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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1961412108분간 우주비행을 한 뒤 무사히 귀환했다. 그리고 세계 역사상 최초의 우주인이 되었다.

   

 

 

새는 - 변종환

 

새는 바람 속으로 훨훨 날다가

빈 나무 가지 끝에 내려앉지만

내려앉기 전 새는,

저울질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무게를 알 수 있을까

 

무리 지어 저렇게 허공중을 떠돌면서도

저 혼자 알에서 깨어날 때

그 빛나던 외로움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리고 새는

하늘과 땅 사이에 널려있는

욕망의 처음과 끝이 어디쯤인지

그것도 조금은 알고 있을까

정말 그것도 알고 있을까

   

 

 

착한 마음 하나 걸어두자 - 정순영

 

아침마다 길을 나서며

시린 손으로 가슴을 비비는 사람들을 위해

착한 마음 하나

고샅길 돌담에 걸어두자.

삶을 여민 옷깃 속에서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위하여

나보다 더 괴로운 사람을 위하여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깊고 처절한 목소리로

기도하는 마음 하나 걸어 두자.

아침의 맑고 진정한 작은 마음의 기도를

응답하는 이가 들으리니

오늘 하루 사립 밖 움츠린 거리에

간절한 마음의 작은 촛불 하나 걸어두자.

어느 착한 마음의 가녀린 기도가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 되리니

아침마다 길을 나서며

착한 마음 하나씩 가슴에 걸어두자.

   

 

 

눈꽃 읽으니 1 - 김두환

 

새아씨 눈웃음인가

 

지어미 순맘인가

 

신명神明 예지인가

 

앞으로 다가서다 바짝 붙여도

차갑거나 시리지 않고 되레

덕량德量이 훈훈하게 배어 오르므로

 

온몸에 온고지정溫故之情 꽃이 새로

새하얗게 초롱초롱 피어나는데다

 

언제 그때 슬금슬금 찝적찝적 입질했던

그 모정慕情 곡두*도 굼적 스멀스멀

감아오르다 꼬집다 문지르다 마지막엔

입술 삐죽 내밀고 끔벅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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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두 : 환영幻影.

   

 

 

영화사 백일 - 홍인우

 

풋감 제법 키운 여름날

주목 염주를 얻다

 

백여덟 알마다 송진 같은 마음 담아

열흘 스무 날이 지나고

물처럼 흐르리라 합장하며

달 가고 계절이 갔다

바람 불 적마다

풍경소리

동심원을 그리던 나무계단 위에서

풀어내고

모으고

다시 풀어내던 통점들

푸른 감잎이 감빛으로 물들고

사무치게 파란 하늘에 점점이 주황색 감 박히던

상강을 보내고

,

한 송이 낙화처럼 홍시 퍽 떨어진 입동 오후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는 주목

백여덟 염주알에 등이 켜진다

   

 

 

돝섬에서 띄운 편지 - 이동훈

 

왕의 여자가 궁을 뛰쳐나갔습니다.

분노한 왕은 추격대를 보내고

왕의 여자는 금빛 돼지 되어 섬에 숨었지만

결국, 화살을 맞고 쓰러졌답니다.

먼 옛날 가락국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무덤에 합장되기를 거부하며

부당한 권력에 동의할 수 없었던

한 여자의 용기 있는 선택이 금싸라기 같습니다.

금빛을 여자의 만만찮은 이력으로 읽는다면

여자의 최후는 권력에 맞짱 뜨던 대가일는지요.

그런저런 생각 끝에 돝섬에 닿으니

금빛 돼지가 따가운 햇살 아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만 무수히 받은 몸

자유를 얻지 못하고 함부로 쏘아 댄 화살을 다 받은 몸

끝내 평범한 여자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서도 울상인 돼지상을 마주하니

전설의 중심은 애초부터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엇갈리는 사랑인 줄 알겠습니다.

왕의 여자가 슬퍼지는 만큼

왕이라는 껍데기 속의 남자도 불쌍해집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두고, 의심하고, 노여워하는

그래서 사랑 받지 못한 남자는

화살을 암만 날려도

그 화살을 제가 다 받아야 하는 운명입니다.

당신과 여기에 왔던 지지난해

국화 축제를 위해 국화 축에 끼이지 못한 풀들이

줄초상을 치렀던 것을 기억합니다.

힘 있는 자의 이기적 사랑이

이렇듯 무고한 희생을 부르는 것이지요.

바람 소리, 파도 소리에 섞여 꿀꿀 소리 들립니다.

무늬만 사랑인 줄 의심하라는 뜻입니다.

누가 뭐라든 자신은 사랑이었다고

그 남자 무덤에서라도 억울을 말할 것 같으면

물살로 가만가만 덮는, 여기는 여자의 섬

조금만 있다가 올라가겠습니다.

   

 

 

구름 위를 걷는 여인 - 정유광

 

작은 집들이 찢긴 현수막처럼 파르르 떨고 있는 산동네

문틈으로 돌아 나가는 찬바람에 얼음장이 된 방바닥에

섬처럼 누워 뒤척이다가 능선허리 같은 뒷모습으로

쪽문을 나서는 여인

하얀 눈이 이불처럼 소복이 쌓인 언덕길을 내려간다

창문은 불빛을 들고 따라 걸어 나왔다

뒤뚱거리는 발자국 무게에 짓눌려

주머니 속 천원 지폐가 꼬기작거리며 튀어 나온다

두리번거리다가 입맛만 다시고

다시 슬그머니 안주머니에 들어간다

새처럼 바람처럼 구름 위를 걷고 싶은 여인

하늘 향해 허우적거리며 먼발치의 봄을 부르고

낯익은 얼굴로 돌아와 세상 걸음 거리로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뒤꿈치에 힘을 주며 걷는다

햇살에 녹아내린 골목길을.

 

 

                                *월간우리3월호(통권 357)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광대나물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