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소상호 제8시집 '밑줄 친 오후'의 봄

김창집 2018. 3. 19. 14:41



8시집을 내면서

 

  ‘밑줄 친 오후라는 제호로 여덟 번째 시집을 내놓는다.

  시집이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섞여 있는 삶의 영혼을 노래하는 것인 듯하지만, 가끔씩 현재에 일어나는 감성을 폭발시켜 그것으로 하여금 다시 내 한 편의 이력으로 태어나 주위를 가만히 존재케 하는 것이다.

  또는 일상을 뒤로 하고 오로지 달려온 허구의 날을 진실로 꿰매는 가쁜 숨을 긴 복식 호흡으로 만드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오후라는 생을 더욱더 굴절 있고 멋있게 장식하기 위하여 두 번째 밑줄까지 치면서 이 가을에 편승하였다.

  두 번째 딸을 시집보내면서 오는 아픈 가슴을 뒤로하고서 밑줄을 긋고 또 긋고 하면서 현실을 직시하지 않았는가.

  아침은 시선한 하루를 위로 하는데 충분한 시작이며, 정오는 우리의 하루를 중심에 다가 오게 하는 중요한 엔실레이지이다. 오후는 오전을 정리하고 저녁을 연결한 수확의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후는 저녁을 연결한 에필로그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밑줄 친 오후는 우리로 하여금 장식하는 삶으로 철학을 매듭짓는 분수령이 될 것이며, 또한 이 시집에 참여해 준 주위의 사람들과 오후의 상념들에게 감사함을 드리는 역할이 될 것이다.

 

                                                           2017밑줄 친 오후어느 날

                                                                                           지은이

 

  


입춘이 지난 산 속에는

 

아직 몸단장중인 나무들에게서 길조가 느껴진다.

방금 도착한 햇살들을 잘 바르고

작은 미풍에도 가지 끝이 분주하다.

 

겨우내 말라붙어 있던 바위들이 생기를 찾고

마아악 길을 잡은 골짜기 물들이 시새움을 즐긴다.

입춘이 온 것이다.

가까운 암자에도 아직은 버티는 나뭇가지의 시샘이

환한 미소는 아니다.

 

그러나 곧 바래는 소리로

꿈이 쏟아지는 겨울밤을 뒤로 하고

봄의 꿈을 그리는 화가가 되어

산속을 깨워 울음을 웃음으로 바꾸는

신들린 삶을 하고 있다.    


 


 

햇살이 곱습니다

 

오늘도 길모퉁이 병원 회복실의 소녀 속으론

몇 방울의 햇살이 링거 줄을 타고

스며듭니다.

 

그곳에도 살짝 비틀어야 따스함이 깨어날

누군가 놓고 간 피로회복제의 봄이 있습니다.

 

햇살들은 과연 어떤 세상을 찾아가다가

내 마음속에 불시착한 그리움일까요.

 

오늘도 햇살은 당신이 애써 피워 내려다

못내 잊고 만 미소로

머물고 있습니다.    


 

 

초록색 창

 

저물어가는 삶의 한 편으로

봄볕이 다가오는 것은

아직도 화롯불 같은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일 듯합니다.

 

봄은 늘 겨울 뒤에 있습니다.

언 계절을 가로지르지 않고는 그 계절에 이르지 못합니다.

 

겨울을 용서하지 않고는 봄을 맞이할 수 없는 것

그대와 내가 귤껍질 같은 차를 끓이고

햇살의 비좁은 영토 속에서 언 손 부비는 까닭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까닭으로~봄을 기다리는 새아침 같은

멋있는 날이 될 것이며,

초록색 창 하나 달아 줄 것입니다.

    

 

입춘명(立春鳴)

 

봄이 바코드를 찍고서 백화점을 차지했다

가까운 마트와 동네 골목시장을 점거했다.

신상품이 되어

종이백에 팔려나가고 있는 봄

입춘쯤의 봄의 정가로 팔려나가는 동안

나는 계절의 이면 도로에 정차하고서 사람의 소리를 살핀다.

나무들의 잡담을 살피고~외도한 겨울을 채찍질로 쫓아 보내고

춘풍 따라 같이 온 봄의 명찰을 달아 드리려고 하나

입춘명의 소리에 깜짝 놀라서 보니

이미 봄은 명찰을 달고 서 있지를 않던가.    


 


 

민들레

 

봄의 한 쪽이 야광처럼 빛난다.

한낮인데도 등잔을 들지 않으면길을 잃을 것 같은 환함이다.

 

세상은 잠시 꿈의 안마당으로 바뀌고

걸어왔던 길이 아득하게 멀어진다.

민들레가 핀 것이다.

홀씨들이 생애가 핀 것이고

가난한 한이 날아가는 것 같다.

 

그렇게도 모질던 겨울바람이 가고

순풍의 돛을 타고서

찾아온 것이다.    


 

 

봄에 우는 꽃

 

벚꽃이 깊다.

온몸으로 깊다.

하루 이틀 깊고 사나흘 눈부시다.

눈부신 것들의 본적은 눈물이다.

 

벚꽃이 하얗게 운다.

밤을 새워 울고 온

하얗게 덮이도록 바람에 잡혀 운다.

 

아마도 눈 덮인 겨울의 연민의 정인지,

아니면 깊은 정에 녹아내리는 제이의 심성인지,

봄을 맞은 신부의 눈물인지도 몰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토록 하얀 면사포를 둘러 쓴 여인이 되어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봄볕

 

봄이 되어 나른한 허공을 넘어오는

햇살들에겐 여린 실밥 자국이 있다.

 

야구장의 아이가 처음 잡아 본

봄의 감촉 같은 따뜻한 무게가 있다.

 

달콤하면서도 해맑은 겨울

저쪽의 사연들 같은

얼굴 없는 사연

 

눈을 감아야 보일 듯 말 듯한

발 없는 역사가 그 안에 있다.



 

 

3월이 오면

 

봄을 드러내기 위한 꽃샘추위가

훨씬 앞당기기 위해 기염만장(氣焰萬丈)하다.

한강은 놀랜 추위 속에서 부아가 났는지

주름이 굵게 드리워 성정이

거칠어 보인다.

 

봄은 어데서 올까?

찬바람 속에서 언 땅에 구겨진 잔디밭에서,

삼동에 저린 잔가지에서

모든 관계에서 금을 긋지 않고

봄은 오는 것이다.

새싹에서 꽃대궁을 지나

꽃잎에서 열매로 가는 길까지도,

이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가롯 유다의 돈 전대에서

계시록까지도.

 

 

             * 후목 소상호 제8시집밑줄 친 오후(하람미디어, 2018)에서

                                 * 사진 : 요즘 한창인 얼레지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