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김병택 시집 '초원을 지나며'

김창집 2018. 5. 2. 17:25


시인의 말

 

   이 시집에서 시적 대상들은 일상 * 내면 * 자연 *

예술 * 역사 * 여행 등 여섯 가지로 나뉜다. 물론 그것

들은 소설이나 희곡에서의 대상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대상들인 동시에 시의 소재를 확장하는 데에 크게 기여

하는 대상들이다.

   나는 시를 쓸 때마다 항상 이러한 점을 명심했다.

 

 

                           2018. 3

                            김병택

   

 

 

숲 앞에서

 

멀리서 보면 나무들이

모여 있는 게 분명했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영혼들이

촘촘히 기립해 있었다.

 

나무들의 색깔이 조금씩 다르듯

영혼들의 모습도 조금씩 달랐다.

 

멀리서 보면 나무들이

말을 걸어올 것 같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영혼들이 곳곳에서

서로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무들의 색깔이 조금씩 다르듯

영혼들의 이야기도 조금씩 달랐다.

   

 

 

동백

 

세월에 갇힌 사연 바위틈에 모았다가

 

비 오고 바람 불 때 하나 둘 꺼내 놓고

 

그리운 색 칠하며 공글린 이야기들이

 

한겨울 붉게 물들인 꽃으로 태어나다.

   

 

 

수선화

 

언제, 어디서 보아도

우장한 흔적이 없다.

순백의 일상이 있을 뿐.

 

돌담 밑 황토색 그늘의

틈새로 빠져나온 향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날아와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으면

 

한 줌의 맑은 바람이

꽃줄기 위를 휘감는다.

   

 

 

백합

 

햇빛 쏟아지는 정원 한 자리에

청초한 모습으로 서 있는 백합

아무리 비바람 거칠게 불어도

숨결과 향기 그대로 남아 있네.

 

달빛 부서지는 나무 아래에서

수줍은 얼굴로 웃고 있는 백합

아무리 세상사 거칠게 흘러도

숨결과 향기 오롯이 남아 있네.

   

 

 

들장미

 

한 무리 바람 지나가는 들판에

홀로 피어 있는 빨간색 들장미

가신 이 소식 들려오지 않아도

한아름 가득히 향기를 뿜는다.

 

한 무리 새들 모여드는 들판에

홀로 서 있는 하얀색 들장미

옛 친구 소식 들려오지 않아도

지난날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다.

   

 

 

왕벚꽃 나무

 

걸어가는 우리 어깨 위로

꽃잎들의 사연이 낙하하고

이 마을의 곳곳에 스며든

울긋불긋한 꽃잎들의 외침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면

사람들은 짧은 여행을 준비한다.

 

여기저기를 순회하는 바람이

지친 우리 어깨 위로 다시

꽃잎들의 사연을 낙하시킬 즈음

생채기를 잘 견딘

사람들의 가슴에서는

밀알 같은 시간의 알갱이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마을에서 노닐던 회색 구름은

꽃잎들의 사연들을 마저 거두어

공중으로 돌아갈 채비에 바쁘고.



 

대나무와의 거리

 

바람이 불 때마다

울안 대나무들이 부딪는 소리에

사람들이 매번 나에게 물었다.

연을 날리기 전,

미리 감아 둔 얼레 실이

저절로 풀리면서 나는 소리이거나

어떤 기운이 나를 향해 달려오다

천천히 멈추는 소리 같기도 했지만

온전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다.

 

혹여, 내 마음의 한 구석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같지는 않았을까.

어제까지도 묵묵히 지내다가

오늘에야 그걸 인정하고 말았다.

 

대나무와의 거리는 이제

지척으로 바뀌었다.

      


               *김병택 시집초원을 지나며(심상시선 94, 201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