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택 시집 '초원을 지나며'
♧ 시인의 말
이 시집에서 시적 대상들은 일상 * 내면 * 자연 *
예술 * 역사 * 여행 등 여섯 가지로 나뉜다. 물론 그것
들은 소설이나 희곡에서의 대상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대상들인 동시에 시의 소재를 확장하는 데에 크게 기여
하는 대상들이다.
나는 시를 쓸 때마다 항상 이러한 점을 명심했다.
2018. 3
김병택
♧ 숲 앞에서
멀리서 보면 나무들이
모여 있는 게 분명했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영혼들이
촘촘히 기립해 있었다.
나무들의 색깔이 조금씩 다르듯
영혼들의 모습도 조금씩 달랐다.
멀리서 보면 나무들이
말을 걸어올 것 같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영혼들이 곳곳에서
서로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무들의 색깔이 조금씩 다르듯
영혼들의 이야기도 조금씩 달랐다.
♧ 동백
세월에 갇힌 사연 바위틈에 모았다가
비 오고 바람 불 때 하나 둘 꺼내 놓고
그리운 색 칠하며 공글린 이야기들이
한겨울 붉게 물들인 꽃으로 태어나다.
♧ 수선화
언제, 어디서 보아도
우장한 흔적이 없다.
순백의 일상이 있을 뿐.
돌담 밑 황토색 그늘의
틈새로 빠져나온 향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날아와
다소곳한 모습으로 앉으면
한 줌의 맑은 바람이
꽃줄기 위를 휘감는다.
♧ 백합
햇빛 쏟아지는 정원 한 자리에
청초한 모습으로 서 있는 백합
아무리 비바람 거칠게 불어도
숨결과 향기 그대로 남아 있네.
달빛 부서지는 나무 아래에서
수줍은 얼굴로 웃고 있는 백합
아무리 세상사 거칠게 흘러도
숨결과 향기 오롯이 남아 있네.
♧ 들장미
한 무리 바람 지나가는 들판에
홀로 피어 있는 빨간색 들장미
가신 이 소식 들려오지 않아도
한아름 가득히 향기를 뿜는다.
한 무리 새들 모여드는 들판에
홀로 서 있는 하얀색 들장미
옛 친구 소식 들려오지 않아도
지난날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다.
♧ 왕벚꽃 나무
걸어가는 우리 어깨 위로
꽃잎들의 사연이 낙하하고
이 마을의 곳곳에 스며든
울긋불긋한 꽃잎들의 외침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면
사람들은 짧은 여행을 준비한다.
여기저기를 순회하는 바람이
지친 우리 어깨 위로 다시
꽃잎들의 사연을 낙하시킬 즈음
생채기를 잘 견딘
사람들의 가슴에서는
밀알 같은 시간의 알갱이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마을에서 노닐던 회색 구름은
꽃잎들의 사연들을 마저 거두어
공중으로 돌아갈 채비에 바쁘고.
♧ 대나무와의 거리
바람이 불 때마다
울안 대나무들이 부딪는 소리에
사람들이 매번 나에게 물었다.
연을 날리기 전,
미리 감아 둔 얼레 실이
저절로 풀리면서 나는 소리이거나
어떤 기운이 나를 향해 달려오다
천천히 멈추는 소리 같기도 했지만
온전히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다.
혹여, 내 마음의 한 구석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같지는 않았을까.
어제까지도 묵묵히 지내다가
오늘에야 그걸 인정하고 말았다.
‘대나무’와의 거리는 이제
지척으로 바뀌었다.
*김병택 시집『초원을 지나며』(심상시선 94, 201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