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문학' 2018년 여름호의 시
♧ 여름날 숲속에 들면 - 김금용
여름날 숲속에 들면
장대비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 허물 벗고 싶다
아마존 강 독 오른 아나콘다 뱀이 되어
죽음의 향내 빨갛게 일렁이는 산딸기 밑으로
허리 구부려 한여름 몽정기를 앓는
겁 없는 열세 살 소년을 물어버리고 싶다
사르르 두 가닥 혀로 설익은 가슴팍을 핥고
태양을 우러르는 마고할매의 딸이 되어
파란 불꽃 일렁일 때까지 껴안아주고 싶다
송곳니 깊이 박아 소년의 순수와 열정을 들이키고
수사마귀를 먹어치우는 암놈 되어
제 안에서 하나 된 새끼를 낳고 싶다
세상 숲 밖으로 나가 원죄의 옷 벗고 싶다
여름날 숲 속에 들면
♧ 안개속의 나무들 - 김내식
늘 바라보는 평범한 산이라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마철
구름에 반쯤 가려졌을 때
신비롭게 보여 진다
대수롭지 않은 찔레꽃도
달밤에 한 번 바라보라
얼마나 황홀하고 아름다운지
사랑도 이것이다
너무나 가까우면
멀어지고 싶은 것은
상대의 그늘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끼리
마주서서 바라볼 때
더욱 사랑스럽다
가까울수록 조금씩은
적당한 간격으로
몽롱하게 바라보자
우뚝 선 나무들의 혼과 혼은
출렁이는 생각의 바람결에
서로를 그리워한다
♧ 안개는 젖은 채로 서 있다 - 김영자
몇 년 전 잠깐 들렸다가 간 절물숲에서 한 삼일 젖어 있는데 머무는 동안 젖어 있는데 까마귀들은 삼일 내내 몰려와 놀자고 한다 왜 이리 뜸하게 왔느냐고 묻는다 노는 것도 젖는 것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젖는 것은 꽃밭이라고
절물에서 안개와 까마귀는 함께 논다 젖어있다 서두르지 않는 장생의 숲길도 젖어있다 안개내림이다 빛 내림 없이 모든 것들이 내리고 있다 관통하는 길이다 올라가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의 찬란함은 찬란하다 우리 모두 함께 내려가면 괜찮을까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이 섞여 있어 고단한 어깨를 눕히지 않는 안개는 젖은 채로 서 있다
♧ 선림원지 오르는 길 - 박미경
웅덩이마다
봄비가 연등을 띄우는 미천골
굽은 허리로 돌계단 오르는
보랏빛 보살
오체투지로 생을 건넌다
그녀의 마른 가슴에
얼레지 꽃 한 무더기 지고
석탑을 돌고 있는 산안개
심장을 흔들며
생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 초병哨兵에게 - 이명
고통 없이 자라는 나무가 어디 있겠느냐
인내해야 한다는 것은 힘든 일
삶이란 슬픔의 연속이라서 바다도 멍들어 검고
하늘도 푸른 것이다
외롭지 않은 나무가 어디 있겠느냐
지켜내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햇살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아랫목에 자리 잡고
바람이 문풍지를 흔드는 것이다
날이 계속 맑으면 땅은 사막이 된다는데
좋은 날만 있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 청춘아
인내를 배우기 위해
나무도 이 무더위에 푸른 옷을 겹겹이 걸치고
혹한에는 옷을 벗는 것이다
저 굴곡의 벌판에
홀로 말없이 서 있는 것이다
어떤 구차함도 필요 없는 것이다
♧ 관계의 형상학 - 조삼현
태풍 차바 다녀간 숲이 멧돼지 떼가 쓸고 간 옥수수밭 같다
나는 지금 숲을 거닐며 내 마음의 황무지에 대하여 생각한다
한 그루 나무가 서는 것은 세상 중심에 두리기둥 하나 세우는 일
아마존이거나 아무르, 지중해 에워싼 나무들이 번쩍 팔을 들어
공중을 떠받는 일, 그리하여 하늘과 땅이 몸 섞어 내통하는 일
한 그루 나무가 아픈 팔을 내리면 우지끈 우주가 기울 듯
무한시공 저 팽팽한 힘의 균형을 스크럼이라 한다면
지구는 머리 위 별과 발아래 저편 하늘 별의별 별과 별
빛줄기의 원심력을 묶고 있는 매듭 또는 천체의 모래시계
주욱 한 올 매듭을 당기면 스웨터의 문양 은판나비가 일순 사라져 버리듯
(나이테는 지구의 영혼을 녹음한 엘피판 귀 대고 들어보면 회전톱과
도끼날 튕기는 신음소리 들리지) 두루마리를 당기듯 억겁
지구의 연보를 벗겨 썼을 뿐인데 빙하는 유빙으로 몸을 바꾸네
계절은 지금 휘모리장단 눈보라 잦은 하역 중, 너는 자꾸
춥다의 감응을 점점 더 몸이 뜨거워 견딜 수 없다 아우성이네
바늘 끝에 터져버린 풍선의 재앙을 어떤 사건의 미리보기라 하자
그래, 우주 한 장 도화지에 허공을 채색하는 한 그루
푸른 물감 나무 붓의 크로키, 해와 달 나무와 나 사이의 도르래!
죽은 이 머리칼은 왜 자랄까, 오래된 무덤 위에 나무가 돋을 때
나는 숲의 시원이 되고 나무는 나의 정령이 되어 동심원을 이루는……
쓰러진 숲을 거닐며 나는 너 없는 산을 생각한다, 이 황량한
* 사진 : 내변산(2018. 6. 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