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산림문학' 2018년 여름호의 시

김창집 2018. 7. 3. 12:51


여름날 숲속에 들면 - 김금용

 

여름날 숲속에 들면

장대비로 쏟아지는 햇살 아래 허물 벗고 싶다

아마존 강 독 오른 아나콘다 뱀이 되어

죽음의 향내 빨갛게 일렁이는 산딸기 밑으로

허리 구부려 한여름 몽정기를 앓는

겁 없는 열세 살 소년을 물어버리고 싶다

사르르 두 가닥 혀로 설익은 가슴팍을 핥고

태양을 우러르는 마고할매의 딸이 되어

파란 불꽃 일렁일 때까지 껴안아주고 싶다

송곳니 깊이 박아 소년의 순수와 열정을 들이키고

수사마귀를 먹어치우는 암놈 되어

제 안에서 하나 된 새끼를 낳고 싶다

세상 숲 밖으로 나가 원죄의 옷 벗고 싶다

여름날 숲 속에 들면

   

 

 

안개속의 나무들 - 김내식


늘 바라보는 평범한 산이라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마철

구름에 반쯤 가려졌을 때

신비롭게 보여 진다

 

대수롭지 않은 찔레꽃도

달밤에 한 번 바라보라

얼마나 황홀하고 아름다운지

사랑도 이것이다

너무나 가까우면

멀어지고 싶은 것은

상대의 그늘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끼리

마주서서 바라볼 때

더욱 사랑스럽다

 

가까울수록 조금씩은

적당한 간격으로

몽롱하게 바라보자

우뚝 선 나무들의 혼과 혼은

출렁이는 생각의 바람결에

서로를 그리워한다

 

 

 

안개는 젖은 채로 서 있다 - 김영자

 

  몇 년 전 잠깐 들렸다가 간 절물숲에서 한 삼일 젖어 있는데 머무는 동안 젖어 있는데 까마귀들은 삼일 내내 몰려와 놀자고 한다 왜 이리 뜸하게 왔느냐고 묻는다 노는 것도 젖는 것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젖는 것은 꽃밭이라고

 

  절물에서 안개와 까마귀는 함께 논다 젖어있다 서두르지 않는 장생의 숲길도 젖어있다 안개내림이다 빛 내림 없이 모든 것들이 내리고 있다 관통하는 길이다 올라가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의 찬란함은 찬란하다 우리 모두 함께 내려가면 괜찮을까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이 섞여 있어 고단한 어깨를 눕히지 않는 안개는 젖은 채로 서 있다      


 

 

선림원지 오르는 길 - 박미경

 

웅덩이마다

봄비가 연등을 띄우는 미천골

 

굽은 허리로 돌계단 오르는

보랏빛 보살

오체투지로 생을 건넌다

 

그녀의 마른 가슴에

얼레지 꽃 한 무더기 지고

 

석탑을 돌고 있는 산안개

심장을 흔들며

생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초병哨兵에게 - 이명

 

고통 없이 자라는 나무가 어디 있겠느냐

인내해야 한다는 것은 힘든 일

삶이란 슬픔의 연속이라서 바다도 멍들어 검고

하늘도 푸른 것이다

외롭지 않은 나무가 어디 있겠느냐

지켜내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

햇살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아랫목에 자리 잡고

바람이 문풍지를 흔드는 것이다

날이 계속 맑으면 땅은 사막이 된다는데

좋은 날만 있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 청춘아

인내를 배우기 위해

나무도 이 무더위에 푸른 옷을 겹겹이 걸치고

혹한에는 옷을 벗는 것이다

저 굴곡의 벌판에

홀로 말없이 서 있는 것이다

어떤 구차함도 필요 없는 것이다


 

관계의 형상학 - 조삼현

 

태풍 차바 다녀간 숲이 멧돼지 떼가 쓸고 간 옥수수밭 같다

나는 지금 숲을 거닐며 내 마음의 황무지에 대하여 생각한다

한 그루 나무가 서는 것은 세상 중심에 두리기둥 하나 세우는 일

아마존이거나 아무르, 지중해 에워싼 나무들이 번쩍 팔을 들어

공중을 떠받는 일, 그리하여 하늘과 땅이 몸 섞어 내통하는 일

한 그루 나무가 아픈 팔을 내리면 우지끈 우주가 기울 듯

무한시공 저 팽팽한 힘의 균형을 스크럼이라 한다면

지구는 머리 위 별과 발아래 저편 하늘 별의별 별과 별

빛줄기의 원심력을 묶고 있는 매듭 또는 천체의 모래시계

주욱 한 올 매듭을 당기면 스웨터의 문양 은판나비가 일순 사라져 버리듯

(나이테는 지구의 영혼을 녹음한 엘피판 귀 대고 들어보면 회전톱과

도끼날 튕기는 신음소리 들리지) 두루마리를 당기듯 억겁

지구의 연보를 벗겨 썼을 뿐인데 빙하는 유빙으로 몸을 바꾸네

계절은 지금 휘모리장단 눈보라 잦은 하역 중, 너는 자꾸

춥다의 감응을 점점 더 몸이 뜨거워 견딜 수 없다 아우성이네

바늘 끝에 터져버린 풍선의 재앙을 어떤 사건의 미리보기라 하자

그래, 우주 한 장 도화지에 허공을 채색하는 한 그루

푸른 물감 나무 붓의 크로키, 해와 달 나무와 나 사이의 도르래!

죽은 이 머리칼은 왜 자랄까, 오래된 무덤 위에 나무가 돋을 때

나는 숲의 시원이 되고 나무는 나의 정령이 되어 동심원을 이루는……

쓰러진 숲을 거닐며 나는 너 없는 산을 생각한다, 이 황량한

   

                                    * 사진 : 내변산(2018. 6. 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