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장영춘 시집 '단애에 걸다'(2)

김창집 2018. 11. 30. 00:43


선흘 겨울딸기

 

폭설에 갇혔다가 제주섬이 풀려난 날

무엇에 홀렸는지 막무가내 중산간 길

산 노루 발자국 따라

하얗게 찾아간 길

 

선흘리 곶자왈에 43의 목시물굴

동짓달 스무엿새 하연달도 기울어

숨어든 짐승들같이

울음 참는 짐승들같이

 

까마귀 울음 몇 점 핏빛으로 흘렸는가

어쩌자고 이 겨울 날 하필이면 예까지와

한 끼의 허기와 같은

한탈 몇 알 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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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탈 : 제주에만 나는 겨울 야생 딸기.

 

 

 

수선화의 봄

 

기다림의 끝에도 그는 피지 않았다

모슬포 돌담 밭에 어떤 역병 돌었는지

 

오 년째 꽃대만 올 뿐

향기 한 번 없는 겨울

 

어느 날 학교에서 사라진 큰아버지

여태껏 야간당직 끝나지 않았 건지

 

저마다 하얀 울음을

물고 있는 봉오리들

 

수선화야, 수선화야 벙어리 수선화야

바람결에 증언하듯 몸부림을 쳐보지만

 

눈치도 체면도 없는

새봄만 다시 왔다

 


 

 

단풍

 

타다만 불꽃을 보며 흔드는 저기 저 손

 

잡목 숲 등허리에 감춰진 이야기인 듯

 

떼 그르, 떼그르르르 바람 앞에 떼그르르

 

한때는 파랗게 중심에 서있었다

 

내 본색은 붉은빛 물들 대로 물들어

 

세상은 뒷문을 열고 배웅하고 있었다

 


  

거미의 집

 

비바람 뚫고 나온

한라산 1100도로 생태 습지

 

보랏빛 꿈 하나를 고명으로 얹어서

손톱이 발갛게 짓무른

거미집을 보아라

 

한때, 반짝이는 것

그림자를 남기지 않듯

 

안개비도 그대로 걸려드는 여름날

한 생은 낙서이든가

못 다 쓴 유서이든가

 


 

 

백서향

 

비린내, 젖비린내

어머니 냄새가 난다

 

돌을 몇 번 넘겨도

마른 젖만

빨아대던

 

곶자왈 고목에 매달려

그 빈 젖을 받고 있다

 


 

 

사람을 찾습니다

 

벚꽃이 터질 때쯤 계절병 또 도진다

참고 산다는 게 스무 해가 지났는데

오늘은 꽃에 홀리듯 무작정 진해로 왔다

 

사진 속 그 자리,

내가 다시 서 본다

꽃 범벅 가지에도 땅에 진 꽃잎에도

하르르 네가 웃는다, 난분분 웃고 있다

 

진해에서 하동으로 화개장터 섬진강까지

그래, 온통 너다 내 몸도 이젠 너다

천지간 수소문해도 나는 없고 너만 있다



 

만평 밥상

 

장마철 밥상 위에

산수국도 피었다

 

오늘은 헛꽃에 홀려

그대 생각에 홀려

 

한동안

꽃그늘 아래

만 평 집을 짓는다

 

 

              *장영춘 시집단애에 걸다(황금알 시인선 184, 201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