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춘 시집 '단애에 걸다'(2)
♧ 선흘 겨울딸기
폭설에 갇혔다가 제주섬이 풀려난 날
무엇에 홀렸는지 막무가내 중산간 길
산 노루 발자국 따라
하얗게 찾아간 길
선흘리 곶자왈에 4․3의 목시물굴
동짓달 스무엿새 하연달도 기울어
숨어든 짐승들같이
울음 참는 짐승들같이
까마귀 울음 몇 점 핏빛으로 흘렸는가
어쩌자고 이 겨울 날 하필이면 예까지와
한 끼의 허기와 같은
한탈 몇 알 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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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탈 : 제주에만 나는 겨울 야생 딸기.
♧ 수선화의 봄
기다림의 끝에도 그는 피지 않았다
모슬포 돌담 밭에 어떤 역병 돌었는지
오 년째 꽃대만 올 뿐
향기 한 번 없는 겨울
어느 날 학교에서 사라진 큰아버지
여태껏 야간당직 끝나지 않았 건지
저마다 하얀 울음을
물고 있는 봉오리들
수선화야, 수선화야 벙어리 수선화야
바람결에 증언하듯 몸부림을 쳐보지만
눈치도 체면도 없는
새봄만 다시 왔다
♧ 단풍
타다만 불꽃을 보며 흔드는 저기 저 손
잡목 숲 등허리에 감춰진 이야기인 듯
떼 그르, 떼그르르르 바람 앞에 떼그르르
한때는 파랗게 중심에 서있었다
내 본색은 붉은빛 물들 대로 물들어
세상은 뒷문을 열고 배웅하고 있었다
♧ 거미의 집
비바람 뚫고 나온
한라산 1100도로 생태 습지
보랏빛 꿈 하나를 고명으로 얹어서
손톱이 발갛게 짓무른
거미집을 보아라
한때, 반짝이는 것
그림자를 남기지 않듯
안개비도 그대로 걸려드는 여름날
한 생은 낙서이든가
못 다 쓴 유서이든가
♧ 백서향
비린내, 젖비린내
어머니 냄새가 난다
돌을 몇 번 넘겨도
마른 젖만
빨아대던
곶자왈 고목에 매달려
그 빈 젖을 받고 있다
♧ 사람을 찾습니다
벚꽃이 터질 때쯤 계절병 또 도진다
참고 산다는 게 스무 해가 지났는데
오늘은 꽃에 홀리듯 무작정 진해로 왔다
사진 속 그 자리,
내가 다시 서 본다
꽃 범벅 가지에도 땅에 진 꽃잎에도
하르르 네가 웃는다, 난분분 웃고 있다
진해에서 하동으로 화개장터 섬진강까지
그래, 온통 너다 내 몸도 이젠 너다
천지간 수소문해도 나는 없고 너만 있다
♧ 만평 밥상
장마철 밥상 위에
산수국도 피었다
오늘은 헛꽃에 홀려
그대 생각에 홀려
한동안
꽃그늘 아래
만 평 집을 짓는다
*장영춘 시집『단애에 걸다』(황금알 시인선 184, 201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