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詩' 12월호의 시 - 1
♧ 등반 - 박정만
산에 가도 산은 안 보이고
산줄기 밀어가는 황국黃菊의 혼만 보인다.
귀를 열면 어디선가
더 큰 귀들이 심장에 와 눕고
소리도 없는 곳에서
문득 메아리 하나가 허공虛空에 길을 낸다.
그러면 내가 떠난 뒤끝에 누가 남아서
이 길로 소리도 없이 지나가리라
누구는 또 눈감고 조용히 지켜보리라.
눈을 감으면 더 큰 눈들이
우리들 가슴에 남아서 지켜보리라.
산에 든 내 안에
또 하나 볼 수 없는 산이 들어서.
♧ 곡선의 시 - 洪 海 里
직선의 시는 싫다
맛도 없고 졸음이 온다.
곡선이 있어 번짐이 있는 시
조용히 스미고 가만히 번져드는
떨리는 거문고 현처럼
느리게 가슴을 울리는 시
그런 시가 좋다.
그러니 시가 익을 때까지
진드근히 기다리거라
야비다리하지 말고
진동한동하지 말고
초벌 매고 이듬매기하면서 농사 짓듯이.
쇠를 달구고 두드리고 담금질하고
또 달구고 두드리고 담금질하고
또 그렇게 해서
날을 세우듯이
이드거니 다듬으면서 기다리거라.
♧ 서산 마애삼존불 - 나병춘
그 누가
마애삼존불
은근한 미소 흉내낼까
한적한 산골에 남아
불쌍한 민초
돌볼 수 있나
사계가
이리저리 누천년
아무리 변해보라
눈 하나 꿈쩍하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
한통속으로 죽비를 친다
불이문不二門
세 글자 속에
돈오돈수, 순간이 영원이니
그 향기 어찌 변할 수 있나
여기가 거기,
그대가 꽃!
♧ 용도폐기처분에 관하여 - 임영희
지금은 몸 바꿔 똥이지만요
천대와 멸시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요
한때는 정갈한 몸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불어넣는 따뜻한 한 끼의 밥이었지요
오가는 발길에 체이며 눈총을 받고 있지만요
조각난 콘크리트의 삭막한 무덤지만요
한 때는 견고한 몸으로 누군가의 언 몸을
녹여주는 한 장의 따뜻한 벽이었지요
무허가 양로원이나 남루한 쪽방에서 요
늙고 병들어 추한 몰골로 널브러져 있는 군상들도요
한 때는 누군가의 가슴에 들어앉아
절절한 사랑을 피워낸 한 송이 빛나는 꽃이었지요
버려진 것들에 대한 가벼움이거나
축복에 싸여 태어난 고귀한 생명이거나
모든 총체적 사물들의 근원은
거룩하고 자비로운 종교였지요
♧ 액자 - 이송희
액자 속엔 귀를 감싼 당신이 살고 있다
수십 장의 얼굴을 가진 고흐의 자화상
여럿의 표정 뒤에서 스스로를 품었던
해바라기 목 꺾은 날, 하늘을 덧칠했지
이명처럼 떠돌던 까마귀 떼 짖어대자
그 까만 소리를 자른 그의 붉은 손가락
고요해진 밀밭 사이로 저무는 숨결 따라
겹겹의 울음을 품은 별들이 눈을 뜬다
두 귀를 가진 사람들, 액자 밖에 서 있다
♧ 능소화 - 전선용
기다림이 가리워진다
어디까지 왔을까
뒤통수를 긁적긁적,
에이, 아직 오려면 멀었네
하지 해는 목을 빼고 서산을 기웃대는데 나는
먼 산에 눈을 던지고
가렵지 않은 이마를 긁는다
보고 싶은 사람아,
어디까지 왔니
또 이마 한 번 긁고 점을 치면
눈시울이 발그레
능소화 핀다.
♧ 가까운 것 - 김혜경
안경에 작은 티끌이 붙으면
산이 내려앉은 것 같이 앞을 가린다
작은 물방울이 묻으면
큰물 들어온 것 같다
아이의 손가락에 박힌 가시에도
대못이 박힌 것 같고
어머니의 삐걱이는 관절에도
세상이 기우는 것 같다
가까운 것들은 늘 크고 무겁다
바람은 헐벗은 가지가 시려서
허공을 짚고 사는 것들끼리 너무 가까워서
늘 저렇게 운다
♧ 가을 - 김병휘
참빛살나무 숲이 붉어졌나
귀뚜라미 기침이 났나
풀벌레들이 별을 노래하고 있나
빗방울소리가 붉어졌나
빗살무늬 햇살이 돋았나
참빛살나무가 미치나
허공에 물 한 그릇 떠도나
빛살무늬 숲이 붉어졌나
고비는
고비를
넘겼다
* 월간『우리시詩』12월호(통권 366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