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우리시詩' 12월호의 시 - 1

김창집 2018. 12. 3. 17:36


등반 - 박정만

 

산에 가도 산은 안 보이고

산줄기 밀어가는 황국黃菊의 혼만 보인다.

귀를 열면 어디선가

더 큰 귀들이 심장에 와 눕고

소리도 없는 곳에서

문득 메아리 하나가 허공虛空에 길을 낸다.

그러면 내가 떠난 뒤끝에 누가 남아서

이 길로 소리도 없이 지나가리라

누구는 또 눈감고 조용히 지켜보리라.

눈을 감으면 더 큰 눈들이

우리들 가슴에 남아서 지켜보리라.

산에 든 내 안에

또 하나 볼 수 없는 산이 들어서.

 

 

 

곡선의 시 - 洪 海 里

 

직선의 시는 싫다

맛도 없고 졸음이 온다.

 

곡선이 있어 번짐이 있는 시

조용히 스미고 가만히 번져드는

떨리는 거문고 현처럼

느리게 가슴을 울리는 시

그런 시가 좋다.

 

그러니 시가 익을 때까지

진드근히 기다리거라

야비다리하지 말고

진동한동하지 말고

초벌 매고 이듬매기하면서 농사 짓듯이.

 

쇠를 달구고 두드리고 담금질하고

또 달구고 두드리고 담금질하고

또 그렇게 해서

날을 세우듯이

 

이드거니 다듬으면서 기다리거라.

 

 

 

서산 마애삼존불 - 나병춘

 

그 누가

마애삼존불

은근한 미소 흉내낼까

한적한 산골에 남아

불쌍한 민초

돌볼 수 있나

 

사계가

이리저리 누천년

아무리 변해보라

눈 하나 꿈쩍하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

한통속으로 죽비를 친다

불이문不二門

세 글자 속에

돈오돈수, 순간이 영원이니

그 향기 어찌 변할 수 있나

여기가 거기,

그대가 꽃!

 


 

 

용도폐기처분에 관하여 - 임영희

 

지금은 몸 바꿔 똥이지만요

천대와 멸시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요

한때는 정갈한 몸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불어넣는 따뜻한 한 끼의 밥이었지요

 

오가는 발길에 체이며 눈총을 받고 있지만요

조각난 콘크리트의 삭막한 무덤지만요

한 때는 견고한 몸으로 누군가의 언 몸을

녹여주는 한 장의 따뜻한 벽이었지요

 

무허가 양로원이나 남루한 쪽방에서 요

늙고 병들어 추한 몰골로 널브러져 있는 군상들도요

한 때는 누군가의 가슴에 들어앉아

절절한 사랑을 피워낸 한 송이 빛나는 꽃이었지요

 

버려진 것들에 대한 가벼움이거나

축복에 싸여 태어난 고귀한 생명이거나

모든 총체적 사물들의 근원은

거룩하고 자비로운 종교였지요

   


  

액자 - 이송희

 

액자 속엔 귀를 감싼 당신이 살고 있다

수십 장의 얼굴을 가진 고흐의 자화상

여럿의 표정 뒤에서 스스로를 품었던

 

해바라기 목 꺾은 날, 하늘을 덧칠했지

이명처럼 떠돌던 까마귀 떼 짖어대자

그 까만 소리를 자른 그의 붉은 손가락

고요해진 밀밭 사이로 저무는 숨결 따라

겹겹의 울음을 품은 별들이 눈을 뜬다

두 귀를 가진 사람들, 액자 밖에 서 있다

 


 

 

능소화 - 전선용

 

기다림이 가리워진다

어디까지 왔을까

뒤통수를 긁적긁적,

에이, 아직 오려면 멀었네

하지 해는 목을 빼고 서산을 기웃대는데 나는

먼 산에 눈을 던지고

가렵지 않은 이마를 긁는다

보고 싶은 사람아,

어디까지 왔니

또 이마 한 번 긁고 점을 치면

눈시울이 발그레

능소화 핀다.

 


 

 

가까운 것 - 김혜경

 

안경에 작은 티끌이 붙으면

산이 내려앉은 것 같이 앞을 가린다

작은 물방울이 묻으면

큰물 들어온 것 같다

아이의 손가락에 박힌 가시에도

대못이 박힌 것 같고

어머니의 삐걱이는 관절에도

세상이 기우는 것 같다

가까운 것들은 늘 크고 무겁다

바람은 헐벗은 가지가 시려서

허공을 짚고 사는 것들끼리 너무 가까워서

늘 저렇게 운다

 

 

 

가을 - 김병휘

 

참빛살나무 숲이 붉어졌나

 

귀뚜라미 기침이 났나

풀벌레들이 별을 노래하고 있나

빗방울소리가 붉어졌나

빗살무늬 햇살이 돋았나

 

참빛살나무가 미치나

허공에 물 한 그릇 떠도나

 

빛살무늬 숲이 붉어졌나

 

고비는

고비를

넘겼다  

 

                          * 월간우리시12월호(통권 36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