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현택훈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김창집 2018. 12. 6. 11:17



시인의 말

 

   이별을 슬퍼하며 청춘을 다 보내니 후회가 남는다. 헤어지고 난 후에도 밥맛을 잃지 않아서 내 사랑을 의심했다. 세상 앞에서 좀 더 의젓해야 하는데 울 궁리만 하는 난 참 어리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으려 시를 썼더니 그 사람이 떠나지 않고 옆에 있다. 그 사람이 잘 떨어지지 않아 난처하다. 제발 이제, 그만 잊어야 하는데 당신은 내게 귓속말로 속삭인다.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귀를 막아도 다 들린다. 바람 소리, 귀뚜라미 우는 소리, 버스 차창에 흐르는 노랫소리, 테니스장 롤러 구르는 소리, 시집 책장 넘기는…….

 

                                                                            201810

                                                                     서귀포에서 현택훈

 


 

 

우리말 사전

 

   누굴까요 맹물을 타지 않은 진한 국물을 꽃물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며칠 굶어 데꾼한 얼굴의 사람들은 숨을 곳을 먼저 찾아야 했습니다 마을을 잃어버린 사람들 한데 모여 마을을 이뤘습니다 눈 내리면 눈밥을 먹으며 솔개그늘 아래 몸을 움츠렸습니다 하룻밤 죽지 않고 버티면 대신 누군가 죽는 밤 찬바람머리에 숨어들어온 사람들 봄 지나도 나가지 못하고 동백꽃 각혈하며 쓰러져간 사람들 사람들 꽃물 한 그릇 진설합니다

   누굴까요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를 비꽃이라고 처음 말한 사람은

   


 

 

솜반천길

 

물은 바다로 흘러가는데

길은 어디로 흘러갈까요

솜반천으로 가는 솜반천길

길도 물 따라 흘러

바다로 흘러가지요

아무리 힘들게

오르막길 오르더라도

결국엔 내리막길로 흘러가죠

솜반천길 걸으면

작은 교회

문 닫은 슈퍼

평수 넓지 않은 빌라

솜반천으로 흘러가네요

폐지 줍는 리어카 바퀴 옆

모여드는 참새 몇 마리

송사리 같은 아이들

슬리퍼 신고 내달리다

한 짝이 벗겨져도 좋은 길

흘러가요

종남소, 고냉이소, 도고리소.

나꿈소, 괴야소, 막은소……

이렇게 작은 물웅덩이들에게

하나하나 이름 붙인

솜반천 마을 사람들

흘러가요

 


 

 

저 불빛

 

아주 가끔 유리병 속 내 집에

노래가 스며들곤 해

물결에 흔들려 희붐한 문손잡이

문을 열면 밀려드는 바닷물

창밖으로 떨어진 다이어리

컵에 어두침침한 그림자가 차올라

혼자 잠들도 혼자 거울 앞에 서는

바닷바람의 눈동자에 눈물이 흥건해

유리창에 얼핏 비친 누군가 낯익은데

어둠이 느리게 헤엄쳐 다니는 방

서랍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해구

해령을 이룬 옷장엔 옷들이 해초처럼 흔들려

유리병 속 집에서 창밖으로 보는

저 멀리 바닷가 불빛

핸드폰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르는

흐리멍덩한 손가락

내 손을 잡지는 마

잡으면 손이 뭉개져버리니까

바닷가 모래 위에 나라가 있었지

유리병 속 시간이 밀물에 깎여

바다 속에서 바라보는

저 별빛

 

 

 

UFO

 

등은 거대한 한대지역

등에서 코요테 한 마리가 산다

기류 타고 하늘 위를 비행한다

슬픔의 그림자보다 더 넓어서

하늘을 가득 채울 때도 있는데

사람들은 그냥 날씨가 흐린 걸로 안다

날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어

아주 천천히 날아다녀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추워

멸종위기동물처럼 차가워

난 구름 속을 헤엄쳐 다니는 걸 좋아한다

구름은 부드럽고

떠나온 별의 눈물을 닮았다

가끔 다른 불빛에서 손짓을 보내지만

대답해주지 않는다

그래도 어쩌다 꼬리나 날개 한쪽을 보고

알아보는 사람도 있지만

거짓말쟁이 취급을 당하니 미안해 죽겠어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하늘을 날고 있다

가끔은 안개가 되어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기도 한다

자정 무렵 사무실에 혼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지친 눈빛이 유골함 같아서

건물을 휘감으며 꼭 안을 수밖에

 


 

 

유선노트

 

구름부터 담으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이 걸어와버렸다

 

안개를 빼고 쓴다면 부드러운 돌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겠지

그러면 독서실 푸른 창문까지 선을 이을 수 있을까

말하자면 노래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아득하고 지난한 일

 

밤 바닷가에서 알몸으로 물에 들어갔던 날들의 달빛은

수많은 선으로 그어져 있어서 노트엔

납작하고 메마른 겨울이 잠들어있다

그런 거라면 서랍 속에서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에게 물을까

 

라디오를 빼고 말하면 복잡한 회로도 실마리가 풀릴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해답이 눈에 보여서 오히려 어려운 문제

책상이라면 용서해주리라 기대했지만 돌아서면

낭떠러지인 세상에서 사람들은

마지막 페이지를 미리 넘겨보곤 하니까

 

소풍을 가지 못한 다람쥐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방에 넣거나 들고 다니기에 적당한 꿈으로 기록되었다

 

사람들은 새 노트를 펼쳤다가 이미

누군가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괜스레 옆에 있던 사람의 안부가 궁금한 척 편지를 쓴다

그러면 속눈썹이라는 가시가 축축한 채 돋아있는 노트가

눈을 뜬다

 


 

 

 

곤을동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안드렁물 용천수는 말없이 흐르는데

사람들은 모두 별도천 따라 흘러가 버렸네

별도봉 아래 산과 바다가 만나 모여 살던 사람들

원담에 붉은 핏물 그득한 그날 이후

이제 슬픈 옛날이 되었네

말방이집 있던 자리에는 말발자국 보일 것도 같은데

억새밭 흔드는 바람소리만 세월 속을 흘러 들려오네

귀 기울이면 들릴 것만 같은 소리

원담 너머 테우에서 멜 후리는 소리

풀숲을 헤치면서 아이들 뛰어나올 것만 같은데

산 속에 숨었다가 돌아오지 못하는지

허물어진 돌담을 다시 쌓으면 돌아올까

송악은 여전히 푸르게 당집이 있던 곳으로 손을 뻗는데

목마른 계절은 바뀔 줄 모르고

이제 그 물마저 마르려고 하네

저녁밥 안칠 한 바가지 물은 어디에

까마귀만 후렴 없는 선소리를 메기고 날아가네

늘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서 곤을동

예부터 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지

 

 

      *현택훈 시집 난 나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걷는사람 시인선 4, 2018)에서

      *사진 20171117일 서귀포 나들이(1100도로 휴게소 - 법정악 - 새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