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제주시조' 제27호의 작품

김창집 2018. 12. 29. 11:17


민들레 - 김향진

 

민들레 씨앗 하나

훌훌히 날아가듯

 

구름 손이 한 자락

살포시 날아오듯

 

잡힐 듯, 잡힐 듯 그 사람

훌훌히 날아가는

   

 

 

신도리 올레길 - 이창선

 

깻단이 널려 있는

신도리 올레길을

은발의 사내가

느릿느릿 걷고 있다

그 깻단

품앗이하던

어머니의 투박한 손

 

돌담길 골목골목

걸었던 발자국 따라

민들레 하얀 꽃씨

갯바람에 날리고

큼큼한

초가 구들방

따스함이 남아있다

   

 

 

모심의 미학 - 김영란

 

 남 시인 옆에는

 못 앉아 안달이지

 

 의원 나리 아닌데도 정치 좀 하신다지 공천권도 갖고 있단 소문 아닌 사실 앞에 의리고 나발이고 다 던지고 달려가지 오는 놈 마다않고 가는 놈 잡지 않아 제자인지 후배인지 작부인지 술 따르고, 취흥 넘친 창부타령에 허벅지도 내어놓지 짭짤한 파도에 둥둥 뜬 섬이 되어 새벽 두 시와 세 시 사이 남 시인이 남신 되지 알콜에 소독하신 깨끗한 몸 부여잡고 공과 사 넘나드는 자유로운 신전에서

 

 성스런 신이 내리는

 공개된 비밀이지

   

 

 

선흘 겨울딸기 - 장영춘

 

폭설에 갇혔다가 제주섬이 풀려난 날

무엇에 홀렸는지 막무가내 중산간 길

산 노루 발자국 따라

하얗게 찾아간 길

 

선흘리 곶자왈에 43의 목시물굴

동짓달 스무엿새 하연달도 기울어

숨어든 짐승들같이

울음 참는 짐승들같이

 

까마귀 울음 몇 점 핏빛으로 흘렸는가

어쩌자고 이 겨울 날 하필이면 예까지와

한 끼의 허기와 같은

한탈 몇 알 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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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탈 : 제주에만 나는 겨울 야생 딸기.

   

 

 

협죽도 - 한희정

 

헤어지자,

통보 앞에

 

애써 괜찮은 척

 

그래도 한 번 더, 주춤주춤 하는 사이

 

공항 길

만석의 비행기

붉은 등을 켜든다

   

 

 

금창초 - 김정숙

     -이덕구 산전에서

 

이제,

들리시나요 보이시나요

아직인가요

줄줄이 피붙이를 총구 앞에 세우시고

사려니 북받친밭에 드러누워

핀 당신

 

구름 속 달님 별님아

쭈뼛 선 나무들아

부디 나를 밟고 가 밝은 하늘 보시게

외롭게 타들어 가던 저 보라색

반골의 피

 

칠십 년을 피고 져도 그 자리 그 빛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가슴

퍽 퍽 찧으며 피는

금창초 꽃잎의 유언

이 봄날을 에이네

     

 

홍매(紅梅) - 김향진

 

봄날이면 다시 한 번 연지를 찍고 싶다.

 

함덕시장 근처에 유물 같은 돌담집

 

43 때 그 집에서도 쉬쉬하는 곡절이 있다

 

그렇게 반세기를 보냈으면 그만이지

 

혼사한 지 며칠 만에 누가 산으로 갔는지

 

별안간 붉은 꽃대를 저리 훤히 올리나

   

 

 

진아영 - 이숙경

 

턱 괴고 생각한다느니 한턱 낸다는 말

그녀에겐 당찮은 슬픔의 관용어였지

씹어서 삼키지 못할 아픔이 우물거렸네

 

따뜻한 포유류의 둥근 턱이 사라진 뒤

어류의 아가미처럼 변해버린 입언저리

죄 없는 사람이었다고 조아릴 틈 없었네

 

살아야 할 신념에 비할 바 없던 이념

오랜 총성 그 환청 무시로 관통하는

무명천 얼굴에 감싼 미안한 역사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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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영 : 제주 4·3사건 당시 토벌대 총탄에 턱이 소실되어 평생 무명천으로 턱을 감싸고 살다 간 할머니의 이름.   

 

                          *제주시조2018 27(제주시조시인협회, 201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