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조' 제27호의 작품
♧ 민들레 - 김향진
민들레 씨앗 하나
훌훌히 날아가듯
구름 손이 한 자락
살포시 날아오듯
잡힐 듯, 잡힐 듯 그 사람
훌훌히 날아가는
♧ 신도리 올레길 - 이창선
깻단이 널려 있는
신도리 올레길을
은발의 사내가
느릿느릿 걷고 있다
그 깻단
품앗이하던
어머니의 투박한 손
돌담길 골목골목
걸었던 발자국 따라
민들레 하얀 꽃씨
갯바람에 날리고
큼큼한
초가 구들방
따스함이 남아있다
♧ 모심의 미학 - 김영란
남 시인 옆에는
못 앉아 안달이지
의원 나리 아닌데도 정치 좀 하신다지 공천권도 갖고 있단 소문 아닌 사실 앞에 의리고 나발이고 다 던지고 달려가지 오는 놈 마다않고 가는 놈 잡지 않아 제자인지 후배인지 작부인지 술 따르고, 취흥 넘친 창부타령에 허벅지도 내어놓지 짭짤한 파도에 둥둥 뜬 섬이 되어 새벽 두 시와 세 시 사이 남 시인이 남신 되지 알콜에 소독하신 깨끗한 몸 부여잡고 공과 사 넘나드는 자유로운 신전에서
성스런 신이 내리는
공개된 비밀이지
♧ 선흘 겨울딸기 - 장영춘
폭설에 갇혔다가 제주섬이 풀려난 날
무엇에 홀렸는지 막무가내 중산간 길
산 노루 발자국 따라
하얗게 찾아간 길
선흘리 곶자왈에 4․3의 목시물굴
동짓달 스무엿새 하연달도 기울어
숨어든 짐승들같이
울음 참는 짐승들같이
까마귀 울음 몇 점 핏빛으로 흘렸는가
어쩌자고 이 겨울 날 하필이면 예까지와
한 끼의 허기와 같은
한탈 몇 알 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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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탈 : 제주에만 나는 겨울 야생 딸기.
♧ 협죽도 - 한희정
헤어지자,
통보 앞에
애써 괜찮은 척
그래도 한 번 더, 주춤주춤 하는 사이
공항 길
만석의 비행기
붉은 등을 켜든다
♧ 금창초 - 김정숙
-이덕구 산전에서
이제,
들리시나요 보이시나요
아직인가요
줄줄이 피붙이를 총구 앞에 세우시고
사려니 북받친밭에 드러누워
핀 당신
구름 속 달님 별님아
쭈뼛 선 나무들아
부디 나를 밟고 가 밝은 하늘 보시게
외롭게 타들어 가던 저 보라색
반골의 피
칠십 년을 피고 져도 그 자리 그 빛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가슴
퍽 퍽 찧으며 피는
금창초 꽃잎의 유언
이 봄날을 에이네
♧ 홍매(紅梅) - 김향진
봄날이면 다시 한 번 연지를 찍고 싶다.
함덕시장 근처에 유물 같은 돌담집
4․3 때 그 집에서도 쉬쉬하는 곡절이 있다
그렇게 반세기를 보냈으면 그만이지
혼사한 지 며칠 만에 누가 산으로 갔는지
별안간 붉은 꽃대를 저리 훤히 올리나
♧ 진아영 - 이숙경
턱 괴고 생각한다느니 한턱 낸다는 말
그녀에겐 당찮은 슬픔의 관용어였지
씹어서 삼키지 못할 아픔이 우물거렸네
따뜻한 포유류의 둥근 턱이 사라진 뒤
어류의 아가미처럼 변해버린 입언저리
죄 없는 사람이었다고 조아릴 틈 없었네
살아야 할 신념에 비할 바 없던 이념
오랜 총성 그 환청 무시로 관통하는
무명천 얼굴에 감싼 미안한 역사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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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영 : 제주 4·3사건 당시 토벌대 총탄에 턱이 소실되어 평생 무명천으로 턱을 감싸고 살다 간 할머니의 이름.
*『제주시조』2018 제27호(제주시조시인협회, 201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