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권경업의 겨울시편

김창집 2019. 1. 3. 18:17


지금 한라산에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눈이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 동안 뭇 사람들의 발길에 힘들었던 등반길에도

상처를 어루만지듯 눈이 소복이 쌓여 있을 것입니다.


올부터는 한라산도 정상까지 탐방할 수 있는

성판악 코스와 관음사 코스에 대한

탐방예약제를 시행한다고 합니다.

 

오늘도 역시 어둑한 것이

한라산에 눈이 계속해서 내린다는 예봅니다.

 

이런 날은 산을 좋아하는 권경업 시인이 생각나서

그의 겨울시편을 모아

눈 사진과 함께 올려 봅니다.

 

    

저녁눈

 

어둡고 칙칙한 마음 위, 하얗게

1도 판화가 찍히기 시작했습니다.

 

끝내 띄우지 못할 그림엽서

날 저무는 사이, 잠깐

화보집 한 권이 엮어집니다

 

 

 

눈 내리는 밤


네가 내게로 다가와

거친 손등 위 여린 눈물이 되는 날은

희한하지

조개골에선 꼭 부엉이가 울고

신밭골 산청 아우네

쇠죽솥 구들목에선 술이 익어

밤이 하얗도록

나도 너에게 눈물이 되는 걸

 

 

 

새벽 눈

 

써레봉 자작숲

누가 저렇게도 정갈히 밥상보를 덮어

멧짐승 아침상 차려두었습니까

   

  

지리산에 눈이 내리면

 

연관스님 계신 실상사

산문 밖, 노박인 운수납자

시린 빡빡머리 돌장승

 

기다린 한 소식에, 옳거니

무릎 탁 칠

하얀 털모자를 쓰겠네요

   

 

눈 내리는 밤

 

도란도란,

멈춘 눈발은 할머니 옛 이바구

함양 산청 구수한 사투리로

바람은 수군댑니다

 

밤머릿재 너머 수동 아재네 뒤란

묻어둔 김칫독에 동치미가 익는다며

 

 

 

숫눈 길의 발자국

 

새들도 깨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이리도 긴 사연의 편지를, 또박또박

남몰래 쓰고 숲으로 간 이여!

 

그대와 편지를 읽어가다 보면

산벚나무 아래 잠시 발걸음을 멈춘

그대가 시인임을 알겠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눈 덮인 산비탈의

맨몸, 맨발로 서서

여린 꽃잎 아롱아롱

눈물처럼 당도하고야말 봄날

그 봄날 같은 누군가를

떨며 기다리는 마음이 그렇다던

   

 

 

겨울 야영

 

등불을 꺼야겠다

 

바람이 불어서가 아니다

산중의 길 모두 지워져

기다려도 올 이 없는 이 눈밭

봄을 멀리 둔 어두운 내 마음의

흔들리지 않는 별을 보고 싶어서다

   

  

흰눈이 내리는 것은

 

가끔은, 칙칙한 땅 위에서

온몸으로 질척이고 싶은 것이다

 

왜냐고, 왜 그러냐고 묻지 마라

 

하얀 가운데, 더 하얗게 지키려 하다 보면

때로는 중압감에, 술 처먹고

한번쯤 꼭지가 돌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숫눈길

 

그대에게 가는 길은 발 시립니다

지워버린 오솔길

다가오지 말라는 숫눈을 밟아

걷고 걷다보면, 또 눈은 내리고

언젠가는 산벚꽃 하얀 꽃눈도 내리고

그때는 시린 발을 잊을 겁니다.

 


            *권경업의 지리산 시편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작가마을 간, 201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