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업의 겨울시편
지금 한라산에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눈이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 동안 뭇 사람들의 발길에 힘들었던 등반길에도
상처를 어루만지듯 눈이 소복이 쌓여 있을 것입니다.
올부터는 한라산도 정상까지 탐방할 수 있는
성판악 코스와 관음사 코스에 대한
탐방예약제를 시행한다고 합니다.
오늘도 역시 어둑한 것이
한라산에 눈이 계속해서 내린다는 예봅니다.
이런 날은 산을 좋아하는 권경업 시인이 생각나서
그의 겨울시편을 모아
눈 사진과 함께 올려 봅니다.
♧ 저녁눈
어둡고 칙칙한 마음 위, 하얗게
1도 판화가 찍히기 시작했습니다.
끝내 띄우지 못할 그림엽서
날 저무는 사이, 잠깐
화보집 한 권이 엮어집니다
♧ 눈 내리는 밤
네가 내게로 다가와
거친 손등 위 여린 눈물이 되는 날은
희한하지
조개골에선 꼭 부엉이가 울고
신밭골 산청 아우네
쇠죽솥 구들목에선 술이 익어
밤이 하얗도록
나도 너에게 눈물이 되는 걸
♧ 새벽 눈
써레봉 자작숲
누가 저렇게도 정갈히 밥상보를 덮어
멧짐승 아침상 차려두었습니까
♧ 지리산에 눈이 내리면
연관스님 계신 실상사
산문 밖, 노박인 운수납자
시린 빡빡머리 돌장승
기다린 한 소식에, 옳거니
무릎 탁 칠
하얀 털모자를 쓰겠네요
♧ 눈 내리는 밤
도란도란,
멈춘 눈발은 할머니 옛 이바구
함양 산청 구수한 사투리로
바람은 수군댑니다
밤머릿재 너머 수동 아재네 뒤란
묻어둔 김칫독에 동치미가 익는다며
♧ 숫눈 길의 발자국
새들도 깨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
이리도 긴 사연의 편지를, 또박또박
남몰래 쓰고 숲으로 간 이여!
그대와 편지를 읽어가다 보면
산벚나무 아래 잠시 발걸음을 멈춘
그대가 시인임을 알겠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눈 덮인 산비탈의
맨몸, 맨발로 서서
여린 꽃잎 아롱아롱
눈물처럼 당도하고야말 봄날
그 봄날 같은 누군가를
떨며 기다리는 마음이 그렇다던”
♧ 겨울 야영
등불을 꺼야겠다
바람이 불어서가 아니다
산중의 길 모두 지워져
기다려도 올 이 없는 이 눈밭
봄을 멀리 둔 어두운 내 마음의
흔들리지 않는 별을 보고 싶어서다
♧ 흰눈이 내리는 것은
가끔은, 칙칙한 땅 위에서
온몸으로 질척이고 싶은 것이다
왜냐고, 왜 그러냐고 묻지 마라
하얀 가운데, 더 하얗게 지키려 하다 보면
때로는 중압감에, 술 처먹고
한번쯤 꼭지가 돌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 숫눈길
그대에게 가는 길은 발 시립니다
지워버린 오솔길
다가오지 말라는 숫눈을 밟아
걷고 걷다보면, 또 눈은 내리고
언젠가는 산벚꽃 하얀 꽃눈도 내리고
그때는 시린 발을 잊을 겁니다.
*권경업의 지리산 시편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작가마을 간, 201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