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홍성운 시조집 '버릴까' 3

김창집 2019. 2. 7. 20:40


사막, 길을 가다

 

마음속 문이 열릴까 먼 길을 나섰다

볼 것을 안 보고 들을 것을 안 듣다가

무심코 사막에 오니

바람 맛을 알겠다

 

기러기 행렬 같은 능선의 카라반들

앞서간 발자국을 연신 되밟으며

잔잔한 워낭 소리로

언덕을 넘어간다

 

사막의 밤길은 별자리로 기우는지

눈물까지 말라버린 낙타의 동공에

따라온 이슬람 달이 혼자 부풀고 있다

 

성자는 사막에서 말씀을 구하고

뜨내기 내방객은 낙타초를 씹느니

성과 속 무너진 경계

선혈 같은 놀이 뜬다

   

 

 

가을 끝이 보인다

 

이따금 바스락

이따금 살그랑

느티나무 그늘에 가을이 깊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머뭇머뭇

구름 몇 점

 

손가락 튕겨본다 끄덕하지 않는다

입바람 불어본다 요동하지 않는다

바람이 건듯 불더니 단풍잎 우수수 진다

 

땅과 하늘 사이

사람과 나무 사이

온갖 색소 풀려 있다

소리가 풀려 있다

 

낙엽이 소리를 끌어

가을 끝이 보인다

 

 

 

겨울 한때

 

반쯤 갠 하늘 가까이 잡목 숲을 바라본다

 

지난여름 번들대던 이파리들 모두 졌다

 

아 저기 작은 동백나무 용케 살아있구나

 

명색의 동백나무라 불그레한 꽃봉우리

 

한기가 더할수록 말문이 열리는데

 

무슨 말 하려다 말고 울컥 지고 만다

 

세상사 그러하듯 황금빛 높은 권좌

 

곧은 나무 타오르는 너덜겅 드렁칡 같은

 

누군가 뇌관을 친다 싸락눈 쏟아진다

   

 

 

버릴까

 

이제 그만 버리세요오래전 아내의 말

 

수십 년 내 품에서 심박동에 공명했던

 

버팔로 가죽지갑을 오늘은 버릴까 봐

 

몇 번의 손질에도 보푸라기 실밥들

 

각지던 모퉁이는 이제 모두 둥글어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를 많이 닮았다

 

그냥저냥 넣어뒀던 오래된 명함들과

 

아직까진 괜찮은 신용카드 내려놓으면

 

어쩌나, 깊숙이 앉은 울 엄니 부적 한 점

     

  

 

꽃들의 노동

 

꽃을 피운다는 건

꽃들에겐 노동이다

 

물양귀비 꽃잎 오므려

분꽃은 꽃잎 펴고

 

주야간 교대 근무하는

봉제공장 누이들 같다

 

꽃들이 한철이듯

인생도 그러겠지

 

폭염 속 소나기든

끈질긴 이명이든

 

어금니 앙다물다가

그냥 흘린 울음이다

   

 

 

꽃의 변주

 

1.

왜 그리 부산떨지

풀잎 흔드는

아지랑이

누군가 한 움큼 꺾어 마른 꽃이 될지언정

내 분첩 단박 터뜨려

이 봄을

물들일까봐

 

2.

여름 땡볕에는 왠지 짐승이고 싶다

사향낭 몸에 품고

이저리 누비다가

선 굵은

나의 등짝에

줄무늬를 넣을까봐

 

3.

설령 향기 없대도 단풍 숲은 꽃밭이다

물이 들면 드는 대로

마르면 마른대로

가을엔

그냥 매달려도

종소리가 새나온다

 

4.

혹한을 참느라 볼이 발간 건 아니다

눈 속을 비집고 나와

주위를 살펴보면

저마다

얼음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있다


  

철새에게 배운다

 

드높은 가을 하늘 채운이 걸리던 날

한 무리 철새들이 편대 지어 날아왔다

찬바람 불어오느니

섬에 뜬 깃털 몇 점

 

철새들 여행이란 극한의 생존이다

따스한 가슴에 대물린 날개 하나

다 저문 서녘 하늘에

끝물의 단풍 같은

 

바닷가 습지는 왁자지껄 난장이다

변경의 난민인 듯 무국적 집시인 듯

섬살이 부대낀대도

안부를 묻곤 한다

 

새들은 무엇 하나 소유하지 않으니

올 때의 몸과 마음, 떠날 때 가볍다고

가벼워 더 넓은 세상

내게도 일러준다

   

 

 

독도의 마음

 

뜨는 해 일찍 보려 갑판에 올라섰다

일렁이던 물결은 이내 잠잠하고

보인다 수평선으로

햇살 품은 섬 하나

 

독도 앞에서는 입술마저 굳어져

외롭다’ ‘그립다는 한 획씩 지워지고

매바쁜 지상의 시간도

물마루에 풀어진다

 

정작 하고픈 말, 뉘라 다할 수 있나

가슴에 묻어둔, 갈매기가 전하는

 

난바다 섬이 되는 건

이냥 기다림이다


                     * 홍성운 시조집 '버릴까'(푸른사상시선 96,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