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홍해리 시인의 봄꽃서정

김창집 2019. 3. 9. 14:04


유채꽃

 

내가 쓰는 글마다

하나같이 노란 연서 같다

성산일출 바다가 풀어놓는 물감보다

시적인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이 온통 노랗다

어쩌자고

제주 현무암처럼

내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가

봄이 오면.

 

 

 

할미꽃

 

생전에 고개 한 번 들지 못한

삶이었으니

죽어서도 여전하구나

있을 때 잘해! 라고 말들 하지

지금 여기가 극락인 줄 모르고

떨며 사는 삶이 얼마나 추우랴

천둥으로 울던 아픈 삶이었기

시린 넋으로 서서

절망을 피워 올려 보지만

자줏빛 한숨소리 우레처럼 우는

산자락 무덤 위

할미꽃은 고갤 들지 못한다

이 에미도 이제

산발한 머리 하늘에 풀고 서서

훨훨 날아가리라, 할미꽃.

   

 

 

명자꽃

 

꿈은 별이 된다고 한다

너에게 가는 길은

별과 별 사이 꿈꾸는 길

오늘 밤엔 별이 뜨지 않는다

별이 뜬들 또 뭘 하겠는가

사랑이란

지상에 별 하나 다는 일이라고

별것 아닌 듯이

늘 해가 뜨고 달이 뜨던

환한 얼굴의

명자 고년 말은 했지만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었지

밤이 오지 않는데 별이 뜰 것인가

잠이 오지 않는데 꿈이 올 것인가

     

 

배꽃

 

1

바람에 베어지는 달빛의 심장

잡티 하나 없는 하얀 불꽃이네

호르르 호르르 찰싹이는 은하의 물결.

 

2

천사들이 살풀이를 추고 있다

춤 끝나고 돌아서서 눈물질 때

폭탄처럼 떨어지는 꽃이파리

그 자리마다 그늘이 파여……

 

3

고요가 겨냥하는 만남을 위하여

배꽃과 배꽃 사이 천사의 눈짓이 이어지고

꽃잎들이 지상을 하얗게 포옹하고 있다

사형집행장의 눈물일지도 몰라.

 

4

배와 꽃 사이를 시간이 채우고 있어

배꽃은 하나지만 둘이다

나와 내가 하나이면서 둘이듯이

시간은 존재 사이에 그렇게 스민다.

 

 

 

서향瑞香

    -화적花賊

 

꽃 중에서도 특히 이쁜 놈이 향기 또한 강해서

 

다른 놈들은 그 앞에서 입도 뻥끗 못하듯,

 

계집 가운데도 특히나 이쁜 것들이 있어서

 

사내들도 꼼짝 못하고 나라까지 기우뚱하네.

   

   

헌화가獻花歌


그대는 어디서

오셨나요

그윽이 바윗가에 피어 있는 꽃

봄 먹어 짙붉게 타오르는

춘삼월 두견새 뒷산에 울어

그대는 냇가에 발 담그고

먼 하늘만 바라다 보셨나요

바위병풍 둘러친

천 길 바닷가 철쭉꽃

바닷속에 흔들리는 걸

그대는 하늘만 바라다보고

볼 붉혀 그윽이 웃으셨나요

꽃 꺾어 받자온 하이얀 손

떨려옴은 당신의 한 말씀 탓

그대는 진분홍 가슴만 열고.

   

 

 

아름다운 남루

    -산수유

 

잘 썩은 진흙이 연꽃을 피워 올리듯

산수유나무의 남루가

저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깔을 솟구치게 한

힘이었구나!

누더기 누더기 걸친 말라빠진 사지마다

하늘 가까운 곳에서부터

잘잘잘 피어나는 꽃숭어리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소리

노랗게 환청으로 들리는 봄날

보랏빛 빨간 열매들

늙은 어머니 젖꼭지처럼, 아직도

달랑, 침묵으로 매달려 있는

거대한 시멘트 아파트 화단

초라한 누옥 한 채

쓰러질 듯 서 있다.

 

이 막막한 봄날

누덕누덕 기운 남루가 아름답다.

   

 

 

개나리꽃

 

그대는

땅 속의 사금가루를 다 모아

겨우 내내

달이고 달이더니,

 

드디어

24금이 되는 어느날

모두 눈감은 순간

천지에 축포를 터뜨리었다.

 

지상은 온통 금빛 날개

종소리 소리……

순도 100%의 황홀

이 찬란한 이명이여.

 

눈으로 들어와

귀를 얼리는

이 봄날의 모순을

누구도 누구도 어쩌지 못하네.

   

 

 

조팝나무꽃

 

숱한 자식들

먹여 살리려

죽어라 일만 하다

가신

어머니,

 

다 큰 자식들

아직도

못 미더워

이밥 가득 광주리 이고

서 계신 밭머리,

 

산비둘기 먼 산에서 운다.

 

 

                        * 홍해리 꽃시집금강초롱(우리시인선 030, 201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