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산림문학' 2019년 봄호의 시들

김창집 2019. 4. 25. 18:10


봄의 기쁨 - 김귀녀

 

고통의 세월 지나고 나면

회색으로 덮여있던 숲길은

솟아오르는 연둣빛에 덮이리

 

초록을 향해 달려가는

푸른 냄새가 있으리

무성한 푸른 이파리 사이로

햇빛은 촘촘히 내리리

 

진달래 지천으로 피고

산 복숭아 산벚꽃으로 이어지는

잔치 한마당 무르익으리

 

당신 향기 천지에 진동하면

침묵으로 가득한 묵상의 시간이어라

 

산과 들에 피었다 지는

들꽃을 사랑하라는 말씀 들려오리

수면 위에 누워

새벽안개를 사랑하라는 말씀 들려오리


   

붉은 비렁길* - 김금용

 

너는 지나가는 바람이었고

머문 적 없는 비였고

잠든 적 없는 별이었으므로

 

바닷내 푸른 미역널방에서 미끄러지고

붉은 동백숲에서 길 잃는구나

 

앞서 떠난 파도가

되돌아오며 네 발목 잡는

숨찬 비렁길에 들어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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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렁길 : 벼랑길의 여수 사투리

   

 

 

시골집 금낭화 - 김대식

 

금낭화는 슬프다

꽃이 피면 더 슬프다

토담가 홀로 앉아

짤랑짤랑 돈주머니 흔들어도

쪼르르 달려올 아이가 없다

금낭화는 슬프다

부처님오시는 날 더 슬프다

집집마다 대문마다

연등을 걸어 놓아도

아무도 찾는 이 없다

금낭화는 외롭다

할아버지 불알처럼 외롭다

힘없이 축 늘어져

지나가는 벌 나비도

지나쳐 간다

   

 

 

겨울을 건너는 잣나무 - 김인숙

 

지금은 바람에게도

송곳니가 돋는 계절,

이빨자국이 선명한 허공의 목덜미를

거꾸로 선 솔잎들이 쓸어내린다

 

웅크린 하늘이 갈기를 털자

깃털처럼 조각조각 오후가 흩어진다

씨앗들은 서둘러 숨은 지 오래고

분주해진 잣나무들이

서둘러 질척한 하루를 쓸어간다

바람은 이파리들은 편식하고

목을 움츠리는 것들

앞니를 드러낸 바람 앞에 동면이 상책이다

바스러지는 각질의 소리로 겨울은 깊고

봄은 내일의 목록에 들어있다

 

위험표시를 붙인 진눈깨비가

깜빡깜빡 제 영역표시를 하며

설치류의 발자국들을 먹어간다

진공포장 된 계절이

제 순서를 기다릴 때

바늘잎을 세운 잣나무들이

넓고 넓은 바람 한 장을 재단한다

   

 

 

흥행興行 - 김청광

 

이른 봄

산수유 생강나무

가슴 저미는 웃음으로

일 년 농사짓는 아침

 

벚꽃은 봄 한 때 벌어서

일 년을 산다지

 

봄날

꽃 안 피우면 하릴없다고

이산 저산 목이 메는 산비둘기

 

피어야지

피어야지

야속한 봄날

 

꽃 못 피우는 내 모가지

봄길 행여 귀인 만나

작은 전대錢袋 흩어진 꽃잎이라도

가득 채울 수 있으려나

   

 

 

봄 숲에 비 내리면 - 김홍래

 

봄 숲에 비 내리면

아우성이다.

찬란한 아우성이다.

 

위대한 생명들의

기침起寢 소리

뜨거운 그 소리

산을 흔든다.

세상을 깨운다.

 

봄 숲이 깔아 놓은

탱탱한 연녹색의 주단 위로

살랑거리며 바람 한 줄기 지나간다.

산 물결도 덩달아 덩실덩실 춤춘다.

키 큰 굴참나무, 키 작은 철쭉나무

나이 어린 풀잎들, 맑은 샘물까지

서로 등 토닥이며 도란도란

어우러져 사는 곳.

 

봄 숲에서

진실하고 풋풋한 연둣빛

삶의 화음和音을 배운다.    


   

가정식 백반 - 박수빈

 

식당 주변을 사내와 아이가 서성인다

아이에게 쪽지를 쥐어주는 사내

식당 안의 여자에게 왼손으로 건네며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

여자가 그릇을 씻어 왼손으로 놓는다

아이가 사내와 여자를 번갈아 본다

사내와 여자의 눈이 만난다

창 너머 목련에서 김이 모락모락

목련이 피어오른다

밥 냄새 피어오른다

소슬한 목련 밥상이 차려진다

   

 

 

동백꽃 - 김관식

 

남쪽 섬

겨울

동백꽃

 

꽃샘바람 시새움에

꽃송이 통째로

떨어져 내린다

 

바닥에 떨어져

다시 피는

꽃송이

붉은 피울음

 

 

                                       *산림문학2019년 봄(통권 3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