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제주작가 64호'의 시조와 튤립나무

김창집 2019. 5. 6. 11:19


노란 고래의 꿈* - 김영란

   -세월호 단원고 명예졸업식

 

끝내 오지 못했구나 빈 의자만 남긴 채

와르르 무너져 주저앉은 울음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세월은 또 흐르고

 

이름 하나 눈물 하나 아롱지는 시간들

침몰할 수 없는 사월, 희망을 꿈꾸며

너 앉던 바로 그 자리 꽃다발 놓아두고

 

가끔씩 물 밖에 숨 쉬러 나왔다가

천 개의 바람으로 세상 구경하다가

노랗게 승천하거라 내 예쁜 고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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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원고에 세워진 조형물의 제목.

     

    


마늘 귀 - 김영숙

 

베란다 구석지에 수상한 초록 보소

촘촘한 망을 뚫고 세상 소리 듣는 저건

마늘의 귀일 것이야 우리에겐 이미 없는

 

사람아 사람들아 귀 한번 만져보아라

사람아 사람들아 입 한번 만져볼 일이다

몸 곯며 던진 메시지 늦겨울이 알싸하다

        

 

욕의 사회학 - 김진숙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조선의 여자 있었네

 

병자호란 삼배구고두레 그 치욕도 모자라

 

두만강 압록강 건너 끌려간 길이 있었네

 

환향녀, 화냥년 덧씌워진 화냥기까지

 

세상은 욕으로 남아 죽지 못한 죄를 묻고

 

돌아와 당산나무에 함께 울던 냇물소리

 

홍제천에 몸 씻으면 과거를 묻지 않겠다

 

혼자 피다 혼자 지다 열녀문 먼발치에

 

아무도 지켜주지 못한, 돌아온 사람 있었네

    

 

 

홍매 - 오영호

 

뜨겁게

뭣 모르고 달아오른

사춘기처럼

 

그 사랑

시샘이나 하듯

몰아치는 꽃샘추위

 

입술을

오므렸다 버는

홍매화 두어 송이

        

 

제주사람 - 이애자

 

부러, 바람 앞에 틈을 내준 밭담들 보라

 

어글락 다글락 불안한 열 맞춤에도

 

쉽사리 허물어지지 않는 엇각을 지니고 있다


    

  

 

배후 - 조한일

 

나이테

수백 번 감긴

두루마리 휴지는

 

살짝만 당겨도

힘없이 뜯기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내 뒤를 봐준다

    

 

 

쌀과 김치 - 한희정

 

올해도 고용 한파가 바닥을 친다는 뉴스

설마 내 아이가 신의 직장을 그만 둘 줄

엄마가 그랬잖아요,

쌀과 김치면 된다.”

 

엄포도 회유의 말도 웃어넘기는 아들 녀석

오장육부 뒤집혀도 겉으로 웃는 어미

직장이 감옥 같단 걸

내가 어찌 모를까

 

어느새 세상물정 아들에게 배우는 나이

쌀과 김치, 네 글자로 삶의 길을 여는 나이

엄동에 움을 키우는

나무처럼 서 있다

    

 

 

봄날의 욕설 - 홍경희

 

 신호등 잠시 잠깐 붉게 걸린 봄날 오후 염병, 씨발 놈아, 지랄, 꺼지라고! 허공에 맞부딪치는 욕 난데없이 튀었어

 

 두꺼운 겨울 외투 어둑한 적막이라

 헝클어진 머리카락 찢겨진 깃털이라

 생각은 솎아내지도 자르지도 못하는 바람이라

 

 빛살을 꼬고 꼬아서 말갛게 치장한 봄이

 스물 댓 젊은 여자는 팔팔한 욕 같았을까

 청춘이 불숙 덮친 사고 같아 두려웠을까

 

 아무도 시시비비 대거리조차 못했어 혼자 겨냥하고 맞선 오리무중 싸움이었거든 화근을 뽑기 위해서 용쓰는 소리 같았어 화들짝 벚꽃잎들만 그녀를 쫓아갔어 난처한 교차로를 우루루루 지나갔어

 

 어쩌면 살 깊은 가시,

 삼켰을까 뱉었을까

    

 

                       --제주작가2019년 봄호(통권 64)에서


 

[후기] 잃어버린 2019년 봄

 

  3월에는 우리 같으면 9월인 남아메리카에서 보내고, 41일에 입원해서 한 달을 병실과 집 방에서만 보냈다. 꽃피는 봄을 온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던 중 5월이 되면서 아파도 호꼼 오몽해보자고 침 맞고 사우나 다니면서 쑤시는 엉치와 다리를 용쓰듯 끌며 걷기도 하고 모임도 나가고 하다가, 병원이 쉬어 침도 못 맞는 어린이날이자 일요일 오후에, 불현듯 튤립나무가 생각나 카메라를 들고 동광양 청귤로 근린공원을 찾았다. 이 공원에 7,80년은 좋이 되었을 성 싶은 튤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튤립나무는 우리나라에 가로수를 처음 심기 시작한 고종 32(1895) 플라타너스(버즘나무), 양버들, 미루나무 등과 함께 들어왔다는 나무다. 플라타너스 같으면서도 튀지 않은 은근한 색의 튤립 닮은 꽃을 달고 있는 나무. 잎이 물들 때도 은근한 이 나무와 꽃을 찍어 내보내며, 한 달을 쉰 나의 왕성한 활동의 시작이 되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