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한라산에 가고지고
요추 협착증으로 4월과 5월을 보내다
어제는 올레 15-B코스 수원리에서 한담동까지
약 7km를 지인들을 안내해 걸으며 막걸리도 마시고
그야말로 큰 발전을 가져왔다.
아파서 4인 병실에서 혼자 신음하며 뒹굴 때는
내가 온전히 나아서 한라산에 한 번 갈 수 있을까?
지금쯤 한라산엔 철쭉은 제대로 피어나고 있을까?
눈에 삼삼히 어리는 영실 바위그늘의 설앵초는?
그러나 이제는 당당히 컴퓨터 앞에 앉아
지난날 한라산에 대한 기록을 검색해 보니,
모든 걸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고
분명히 기억나는 사진도 못 찾는다.
아쉬운 대로 사진 몇 장을 골라
좋은 시와 함께 내보낸다.
♧ 조릿대가 고산으로 간 이유 - 채원 강연옥
지구 온난화의 채찍질로,
제주 조릿대 군락이 한라산 고지를 향해 밀려 올라
가 땅을 뒹굴며 자라는 양지식물 시로미를 에워싸
숨통을 조이고 있다. 시로미는 고산의 비바람에
부딪히며 햇살에 제 몸 섞여야 까맣게 단물 들거늘
제 그림자 땅에 묻으려 잎새 비비는 조릿대에 눌
리어 실성하다 시들고 마는 현실, 아프고 서럽다
이제 시로미의 살길이란 척박한 돌밭에 기어오르
거나 더 추운 고지를 향해 허겁지겁 오르는 일 뿐.
더 이상 핏물 마를 것 없는
창백한 구상나무 고사목
굶주림의 상처인 냥
허연 뱀 껍질을 뒤집어 쓴 채
계절을 맞고 있고
백록담 분화구엔 영생의 꿈처럼
하얗게 서리가 내려도
돌매화는 의지의 입술 깨문 채
여위어만 간다
삶에 있어서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가?
들판을 휘젓고 다니며 꽃을 따는
애 밴 이유 모르는 백치 소녀처럼
정작 조릿대는 알지 못한다
고산으로 가게 된 이유를
♧ 세상에서 유배 사는 그대에게 - 정진용
바람 타고 바람의 본적지까지 왔습니다.
다시 제주도 풍경에서 내 가슴 절도로 귀양 와
침묵으로 울타리 두르고 마음조차 홀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 그리울 때면 수시로 연기며 횃불 올렸으나
알아보는 사람 드물었습니다. 내 살아온 값입니다.
그럼에도 그걸 알아준 사람 만나면 술잔 올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떠났어도 며칠 동안 속으로 슬퍼할 뿐
내 아픔처럼 눈물 넉넉하게 내어드리지 못합니다.
오늘과 다르지 않은 종천(終天)도 이렇게 맞겠습니다.
내 얘기에 아무 말 않는다면 당신도 혼자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뭐라고 한마디하고 싶겠습니다만
정말로 혼자라는 걸 안다면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모든 걱정과 외로움 또한 아무렇지도 않을 겁니다.
나 떠나온 곳에서 어수선한 바람 불어올 때마다
바람의 본적지 찾던 날의 다짐으로 가슴 다스립니다.
산다는 건 어마어마한 고역도, 흩날리는 바람도 아니고
제 그릇 안에 담긴 것만큼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라산 벼랑에서 바위틈 움켜쥔 구상나무처럼,
바닷가 돌담 헤집고 나오는 팽나무 뿌리처럼.
♧ 한라산 백록담 - 김윤자
먼발치에서 당신을 보고 간 한 여인이
다시 그리움 안고 와
하루의 역사를 온전히 쌓고 갑니다.
영실코스 가파른 절벽 길을 숨이 멎도록 걸어 오르며
오백나한의 기암 속에 망자로 선다 해도
나는 진정 행복하여서
당신 그 넓은 품에 뒹굴어도 보고
병풍바위 지나, 구상나무 숲길 지나
선작지왓 고산의 너른 평원을 가로지르며
오월의 꽃불로 일어서는 철쭉꽃 축제의 물결에
지친 육신이 일어서고
노루샘 약수로, 혼미한 영혼이 일어서고
윗세오름봉에 거룩한 당신이 보일 때
발보다 눈이 앞서 달려가
당신을 사랑한 낮달이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하늘에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도 걸고 왔습니다.
어리목코스 하산 길에서
당신의 따슨 숨결로 키운 노루도 만나고
제주 바다 위, 순결한 해무와
무한한 자유로 용솟음치는 운해의 설경도 만나고
해가 지기 전 어서 가라고
숨가쁜 음계로 깔아놓은 나무 계단을
잘박잘박 걸어 내려오며
당신만큼 용감해지리라 다짐하였습니다.
♧ 말 못할 어떤 꿈 - 김명리
1
구상나무에 설화석고 필 때
범종소리는 얼어붙은 종을 떠메고 간다
물 담은 장항아리 내려놓고
앳된 사미니는 명부전 뒤뜰에서 울음을 삼켰다
병풍 속에 붙박힌 천녀(天女)들아
호거산에 봄 오면 천의 휘날리며 죄다 날아가 버려라
해거스러미 밟으며 하산한
내 어머니 사미니…
2
바람 센 봄 뜨락에
자두꽃 앵두꽃 번차례로 피었단 지고
층층나무 조붓한 흰 꽃 아래
천남성 꽃대들 속절없이 허물어진다
놀라서 휘부연 눈시울로 보면
노란띠좀잠자리 날개빛 같은 당신의 허물
숨 타는 땡볕 속
파정(破精)의 나무그늘 미친 듯 파헤치고
날아오르는 뉘 멱살 거머쥐고
내 아버지냐고 물었어야 옳으냐
제 애간장 이고 진 저 꽃빛들
제 애간장 찢어발겨 하늘에 문대는 저 꽃잎들!
♧ 등산 - 김희철
잊지 않겠습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다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어리목에 이르렀다고 해서
백록담에 다다른 것도 아니고
내려갈 일도 있습니다.
산을 오르느라고
힘들었던 일은 잊고
지나온 일에
너무 매달리지 않겠습니다.
삼십 문턱을 넘어서
세상은 조금 보일지 모르지만
아직도 정상과
내려가는 일이 남았다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오르는 것보다도
내려가는 것이 더 험하다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 영실계곡은 - 임영준
한라산 영실계곡은
눈물 없인 건널 수 없다
그녀와 발을 담그면
총총한 별만큼의 희열이
생생하게 넘쳐났고
든든한 오백장군들도
간절한 소망과 절정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지
그 은밀한 야영의 열기는
여정에 스며들어 가
포말이 된 지 오래지만
가끔은 되살릴 수도 있는
청춘의 실마리가 되어있었지
♧ 호수 - 박인걸
호수에 오면 내 마음이
맑은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고향만큼이나 넉넉하게
받아주기 때문이다.
호수는 언제나 푸근하게
하늘과 구름과 산도 품는다.
산이 저토록 아름다운 건
호수에 몸을 담그기 때문이다.
사납게 뛰놀던 바람도
호수에 이르면 순해 지지만
호수에 비친 내 모습은
아직은 일렁거리고 있다.
호수에 나를 빠트리고
며칠만 잠겼다 다시 나오면
내 마음과 눈동자도
호수처럼 맑아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