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만연사 배롱나무 축제

김창집 2019. 8. 9. 06:35


화순 백아산 다녀오는 길

비행기 시간이 남아 개울에서 좀 쉬려고

만연사(萬淵寺) 숲으로 갔다.

 

만연사에서 배롱나무 축제가 열린다고 해서

배롱나무가 있는 대웅전 마당으로 가보았다.

 

꽃은 그렇게 화려하게 피지 않았으나

아직도 등()을 달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사진 전시회장에 가보니,

100일 소원 등을 달고 1년 내 그대로 있어

빈 가지만 남은 설경 속의 등() 사진이 좋아 보인다.

 

만연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로

1208(희종4)에 선사 만연(萬淵)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배롱나무는 껍질이 없다 - 김종제

 

고운사 절간이

무덤처럼 고요하다

배롱나무를 언제 심어놓았는지

처마끝에 매달아놓은 풍경을 닮았다

바람에 꽃끼리 부딪히며

범종처럼 댕댕, 공명을 울리고 있다

배롱나무는 껍질이 없다고

발끝으로 다가가 보니

맨몸처럼 빛난다

눈을 감고 손으로 더듬는데

상처 많은 뼈마디가 잡힌다

생에 오래 단련된 것들은

껍질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라고

오래 묵은 산사나 무덤가에

배롱나무 심어놓은 까닭을 알겠다

뼈만 남은 저 나무를

엊그제 보고 온 것 같은데

이제는 쓰러져 와불이 된 사내

몸에 좋다고 껍질은 누가 뜯어가고

살도 없이

통뼈로 누워있는 당신

배롱나무 심어놓은 사람 죽으면

붉은 꽃 대신에

삼년이나 흰꽃이 핀다고

대웅전의 누가 넌지시 일러주었으니

나도 당신 옆에서

고즈녁한 배롱나무로 서 있겠다고

옷을 벗는 것이다     


 

 

배롱나무와 산죽 - 사강 정윤칠

 

두어 그루 오래된 나무가 있다.

개심사에 가면

돌계단에 작은 구름 마중 나와 반긴다. 客影(손님 그림자)

 

배롱 꽃 연못에

살포시 앉아 인연의 물결을 담고

흰 수련은 얼굴을 보였다.

 

개심사에 가면 귓볼 간지럽히는 세 가지 소리가 있다.

청아한 염불소리

물소리

솔바람 소리

넘보지 못할 이승의 꿈을 담고

배롱 꽃은 연못 위에 잠을 잔다.

 

물끄러미 아름다운 구름과 맑은 향기 맑은 소리

내 눈에 들어왔다

산죽은 옆에서 배시시 웃고 있다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서 - 이정자

 

사랑아, 이제 우리 그만 아프기로 하자

피어서 열흘 가는 꽃 없다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무색케 하는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서 우리 뜨겁게 만나자

당신과 내가 눈 맞추던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가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을 견디며

배롱나무 꽃이 백 일 동안이나

거듭 꽃 피워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호숫가 노을이 다 지도록

가슴 속 그리움 다 사위도록

무언의 눈빛으로 나누자구나

서로에게 눈 먼 죄로 쉽게

해 뜨고 해 지는 날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흘러가는 강물에 띄워 보내며

배롱나무 꽃보다 더 화사한 사랑 하나

우리 생애에 새겨 넣자구나, 사랑아     


 

 

배롱나무 꽃잎 지니 - 양수경


붉은 꽃잎들의 행렬 이어진다.

계절을 꽉 채운 끓는 열정

혼신의 힘으로 꽃피운 날들 기억하니?

겹치마 둘러쓰고

가을의 환상을 미련없이 거부하던.

흔들리며 피고지는 무념과 인내

홀로 의연한 너를

바람은 다시 쉼 없는 사랑을 퍼 붓겠지.

삶이 익숙해진 그리움에 고통은 없다

촛농처럼 뜨거운 눈물도 없다

타인의 계절은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부표(浮漂)처럼 아슬 아슬한

현기증을 일으키는 붉디 붉은 대궁

핏속의 피 까지 다 훑어버린

인간의 오르가즘이 싸가지 없다면

사뿐한 가을을 고문하는 꽃잎의 교성은

대지를 적시는 빛의 반란인가?

 

가을은 그렇게,

그림자를 삼키며 춤추는 나무가 되었다    


 


 

백련사 배롱나무 - 김종구

 

매미 피울음 쏟아지는 땡볕아래

선홍빛 가슴 활짝 열어젖히고

꽃 염주 돌리고 있다

아연 화안해진 법당 안 부처님만

색즉시공 공즉시색

마음 하나 흔들리지 않고

 

하안거 중인 스님들의 온몸에 불이 난 땀띠인가

화두 깨우치는 밝음인가

아님 처녀 동박새 참다 참다 이제사 뱉은

처연한 목울음인가 생각하다

그냥 황홀경에 빠져 있을 때

 

비구니 한 분 자던 바람 일으켜놓고 지나가자

배롱나무 냄새가 난다

그때, 배롱나무에선

화엄경 소리 들리고

속살 냄새 확

시인이 뒤집어썼는데

 

게슴츠레하게 보고 있던 낮달

뜬금없이

바짓가랑이 내린 구강포 에

철푸덕 철푸덕

제 몸 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