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개비 꽃의 추억
♧ 농부(農夫) - 박인걸
나의 아버지는 농부였다.
아침 해가 동해에서 잠잘 때
아버지는 쟁기를 들고 둑길을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식솔이 무거워
짧은 여름밤 잠도 줄여야 했다.
부지런하고 억척스러워
누워 있는 것이 불안하였고
잡히는 대로 일을 해야
뒤주 간 곡식을 채울 수 있었다.
잦은 낫질에 베인 손마디는
꿰맨 고무신짝 같고
고된 호미질에 열 손가락은
아궁이 속의 부지깽이가 되었다.
모내기에 허리가 휘고
온 종일 피사리에 다리가 휘청인다.
한 여름 뙤약볕에 콩밭에 엎드리면
긴긴 해가 서산에 걸리도록
달개비를 뽑으며 땀을 쏟았다.
노예처럼 노동해도 소득은 줄어들고
춘궁기의 농부 가슴엔 고름만 고였다.
장대비가 쏟아지면 논둑을 지키고
여름가뭄에 가슴은 숯이 된다.
개미보다 더 열심히 일해도
쌓이고 늘어나는 것은 빚이었으니
에어컨 바람을 쐬며 소파에 앉아있노라면
아버지 생각에 죄스럽다.
♧ 보랏빛은 - 강인호
송골재 너머 학교 다녀오던 시오리 산길
소나기 지나가고 구름 사이 쏟아져 내려
들녘에 넘쳐 출렁이던 열세 살 맑은 햇빛
까만 교복 단정한 머리 눈부시던 칼라 깃
설레고 두근거리는 맘 끝내 부치지 못하고
개울에 실려 보낸 열여섯 미색 꽃 편지지
막차는 끝내 오지 않고 이십 리 신작로길
포플러나무 긴 그림자 밟으며 걸어올 적
가슴속까지 환해지던 열아홉 살 보름달빛
긴 머리 작고 둥근 어깨 수줍음 많은 미소
신리저수지 한적한 길 부끄러운 첫 입맞춤
서녘 하늘 붉게 물들이던 스물셋 노을빛
기어서 올라가던 상도3동 가파른 산동네 끝
집도 차도 없이 아득하고 막막하던 서른 넷
저 멀리 한강을 따라 흘러가던 서울의 밤빛
파도소리 바다내음 그리워 동해 다녀오는 길
산벚꽃 길 칠십 리 구불구불 한계령 늦은 봄
연두에 번지던 연분홍빛 지워지지 않는 마흔
사는 게 괜히 슬퍼지고 막막해지는 마흔여섯
언제부터 내 가슴에 들어와 자리 잡은 것일까
제비꽃 달개비 애잔하니 깊고 푸른 보랏빛은
♧ 달개비꽃 - 최남균
햇살 나른한 산길에서
보폭에 맞는 사람끼리 달리기하는데
자꾸만, 무슨 꽃이냐고
바이올렛이 아니냐고
응원 나온 소녀들처럼 수줍다고
물어보는 것인데, 감탄사가 숨차다.
낮에만 피우는 작은 꽃이
간밤 하늘에서 어슴푸레 떠돌았으니
남빛 꽃잎에 흥건한 이슬이 땀방울이라고
파란 가슴 다소곳이 가쁜 숨 가다듬은
이른 아침 산길에서
나란히 달리는 이가 자꾸만, 묻는데
내 기억은 감감한 밤하늘이고
달개비 같은데, 무언의 아침은 밝다.
산은 깊은 심장에 바람을 품어
숨골 계곡은 경사로 내달리는데
쉬엄쉬엄 피었다가는 꽃이 무엇이냐고
자꾸만, 조근조근 속삭이며 같이 가자하는데
눈에 밟히는 저 꽃이 무엇이냐고
의문이 엷어지는 동안 하산하니, 아직도 여름이다.
♧ 두물머리 강가에서 - 한도훈
아리수(阿利水) 두물머리 강가
푸짐한 쇠똥 위에
쉬파리 한 마리 앉아 있다
면벽(面壁), 꼿꼿한 자세로
한 호흡 한 호흡 물안개 속 정신을 가다듬더니
비비는 손바닥 속도를 더한다
서시(西施) 허리 닮은
명주바람 한 점 없지만
달개비 속눈썹은 가늘게 떨리고
금강산 북한강 물
금대봉 검룡소(劍龍沼) 남한강 물을
두루 마셔 통통히 살이 오른
두물머리 참붕어
모꼬지 나온 한 아이가 물구나무 선 채
쇠똥 위 쉬파리를 바라본다
아리수(阿利水) 두물머리 강가
물그림자에 비친
아리랑 황포돛배는
내 여윈 가슴으로 젖어들고
천년의 나루터,
뱃사공들의 하늘까지 쌓인 여한(餘恨)을
언감생심 엿보지 말라며
느티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여름 까마귀 넋 놓고 우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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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바람 : 부드럽고 화창한 바람
♧ 숲의 길 - 김영천
햇빛이 아니어도
달빛이 아니어도
숲은 자기들끼리 만의 소리로 서로 빛을 낸다
자기들끼리 만의 흔들림으로
서로 빛을 낸다
깜깜한 어둠 속이어도 바람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숲의 샛길을 지나가고
이슬이나 안개나 물방울들도
거침없이 숲의 강을 지나가는 것이어니
새벽도 그렇게 오는구나
개망초꽃 피어 흔들리는 사이로
달개비꽃 피어 흔들리는 사이로
자기들만의 작은 빛을 내주는
그 길을 따라 오는구나
이 오만한 자들의 나라에서
이 불민한 자들의 나라에서
새벽은 어느 빛을 따라 올까
숲은 스스로 빛을 낸다
우리도 이젠 작은 사랑으로 모여 빛을 낼까
우리도 이젠 작은 기쁨으로 모여 빛을 낼까
아아, 낮은 풀꽃들로 우루루 피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