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 9월호의 시와 물봉선
♧ 물 통桶 - 김종삼
희미한
풍금風琴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桶 길어다 준 일 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廣野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 안빈 – 김석규
돈 주고도 못 사는 가난을 누릴 수 있다는 것.
♧ 성복聖福 - 김영호
먼 나라로 여행을 하는 동안
한 애독자가
나 즐겨가는 산책로 길가에
꽃씨들을 심었다 했네.
여행에서 돌아와
나 꽃들을 볼 수 있도록
그는 먼 길을 와
물을 부어주었다 했네.
나를 반기는 패랭이꽃 백일홍 금잔화
오래 바라보다가
그 꽃들에게 몸을 숙여 경배를 드렸네.
꽃잎 속에서 신神을 보았기 때문이네.
두 귀가 눈물을 떨구었네.
엉겹결에 깨물어 먹었던
보름이라고 불렀던 먼 여인아
오늘 밤은 달도 하도나 환해서
박하사탕처럼, 박하사탕처럼
너를 오래 빨아먹는 밤이다
정말 미안해, 내 보름아
오염된 희망마저 삼켜야 하는
비애의 열정이 저녁노을로 숨어들어
삶의 의미를 궁금해 한다
가슴의 단내만으로도
저녁노을은 황홀한 것
하루가 또 저물었다.
♧ 국맛이 진국이야 – 정유광
서로 다른 본질이 냄비에서 끓는데
국물은 진국이다 푹 고아 우려내면
담백한 국물맛에서
진심이 우러난다
숨 죽은 채소도 한때는 강한 본성
한소끔 끓어오르면 같이 어우러져
나에게 꼭 필요한 건 비등점 섭씨 백 도
♧ 들풀과 풀꽃 – 우정연
들풀과 풀꽃이
이마를 마주하고 살아가는 언덕에
햇살도 미안해하며 저만큼 비켜서 있다
민들레, 질경이, 망초, 참비름
빼죽빼죽 얼굴을 내밀어
흔적 없어 보이는 그들끼리
흔들리다가 흔들리지 않다가
누구 한번 눈길 보낸 적 없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기대서 있다
가끔 한번씩
키가 늘어진 오후 햇살의 하품 소리에
듣지 않는 듯 쫑긋
귀를 풀어놓기도 한다
♧ 달 고치 – 호월
차가운 밤하늘에
다듬이 소리 긴 명주실이
눈썹달에 걸려 있습니다.
다듬이 소리가 천상에 피어올라
명주실이 되어 달 고치를 짓고 있습니다.
며칠 더 실을 뽑으면
고치는 둥글어지고
여인의 한은 고치 안에 갇힌 누에가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조용한 밤
명주실은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하고
여인의 한도 따라 슬그머니 사그라집니다.
흰 적삼의 가냘픈 여인은
외로운 한밤에 다듬이로
시린 밤하늘에 한의 고치를 짓고 있습니다.
* 『月刊 우리詩』2019년 9월호(제375호)에서
* 사진 – 요즘 한창 피어나고 있는 ‘물봉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