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우리詩' 9월호의 시와 물봉선

김창집 2019. 9. 9. 12:47


물 통- 김종삼

 

희미한

풍금風琴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길어다 준 일 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廣野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안빈 김석규

 

 돈 주고도 못 사는 가난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성복聖福 - 김영호


먼 나라로 여행을 하는 동안

한 애독자가

나 즐겨가는 산책로 길가에

꽃씨들을 심었다 했네.

여행에서 돌아와

나 꽃들을 볼 수 있도록

그는 먼 길을 와

물을 부어주었다 했네.

나를 반기는 패랭이꽃 백일홍 금잔화

오래 바라보다가

그 꽃들에게 몸을 숙여 경배를 드렸네.

꽃잎 속에서 신을 보았기 때문이네.

두 귀가 눈물을 떨구었네.

 

    


보름달 나석중

 

엉겹결에 깨물어 먹었던

보름이라고 불렀던 먼 여인아

 

오늘 밤은 달도 하도나 환해서

박하사탕처럼, 박하사탕처럼

 

너를 오래 빨아먹는 밤이다

정말 미안해, 내 보름아

 

    


박병대


 

오염된 희망마저 삼켜야 하는

 

비애의 열정이 저녁노을로 숨어들어

 

삶의 의미를 궁금해 한다

 

가슴의 단내만으로도

 

저녁노을은 황홀한 것

 

하루가 또 저물었다.

 

    

 

국맛이 진국이야 정유광

 

서로 다른 본질이 냄비에서 끓는데

국물은 진국이다 푹 고아 우려내면

담백한 국물맛에서

진심이 우러난다

 

숨 죽은 채소도 한때는 강한 본성

한소끔 끓어오르면 같이 어우러져

나에게 꼭 필요한 건 비등점 섭씨 백 도

    

 

 

들풀과 풀꽃 우정연

 

들풀과 풀꽃이

이마를 마주하고 살아가는 언덕에

햇살도 미안해하며 저만큼 비켜서 있다

민들레, 질경이, 망초, 참비름

빼죽빼죽 얼굴을 내밀어

흔적 없어 보이는 그들끼리

흔들리다가 흔들리지 않다가

누구 한번 눈길 보낸 적 없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기대서 있다

가끔 한번씩

키가 늘어진 오후 햇살의 하품 소리에

듣지 않는 듯 쫑긋

귀를 풀어놓기도 한다

    

 

 

달 고치 호월

 

차가운 밤하늘에

다듬이 소리 긴 명주실이

눈썹달에 걸려 있습니다.

다듬이 소리가 천상에 피어올라

명주실이 되어 달 고치를 짓고 있습니다.

 

며칠 더 실을 뽑으면

고치는 둥글어지고

여인의 한은 고치 안에 갇힌 누에가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조용한 밤

명주실은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하고

여인의 한도 따라 슬그머니 사그라집니다.

 

흰 적삼의 가냘픈 여인은

외로운 한밤에 다듬이로

시린 밤하늘에 한의 고치를 짓고 있습니다.

 

 

                           * 月刊 우리20199월호(375)에서

                              * 사진 요즘 한창 피어나고 있는 물봉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