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
♧ 귀가 쓰는 시 - 김영호
한 송이 클로버 꽃잎에서 사슴이 걸어 나왔네.
그 사슴이 나의 귓속으로 들어오니
귓속에서 꽃피는 소리가 들렸네.
잠시 귀가 울음을 멈추었네.
그때 나의 귀가 말을 했네 꿈이 있다고.
그 꿈은
나의 귀보다 더 우는 사람의 귀 끝에
클로버를 모종하는 것이라 했네.
그의 귀 끝에 애리조나의 햇빛을 발라주고
콜로라도강물을 부어주는 것이라 했네.
그의 우는 귀에서도 꽃피는 소리를 듣는 일이라 했네.
그의 우는 귀에서도 벌새의 노래를 듣는 일이라 했네.
그의 귀에서도 영혼이 울음을 멈추는 일이라 했네.
♧ 밀양 - 나석중
아픈가?
만어산 돌띠를 두른 허리
무량, 무량 낱낱이 닫은 문
누구 있소?
두드리면 우주의 목청 알 수 없지만
다시 캄캄 걸어 잠그는 문, 문…
그렇다고 잠만 자는 돌들은 아니어서
붙박이 돌 강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이건 육천오백만 년 전 솟아오른 아우성
그만큼 침묵도 오래 닳고 닳으면
맑은 종소리를 내는가
종석鐘石이라 돌 강이라 부르는 너덜겅
그저 상상은 억측일 뿐이다.
눈멀고
귀 닫고
입 다물라
♧ 들풀과 풀꽃 – 우정연
들풀과 풀꽃이
이마를 마주하고 살아가는 언덕엔
햇살도 미안해하며 저만큼 비켜서 있다
민들레, 질경이, 망초, 참비름
빼죽빼죽 얼굴을 내밀어
흔적 없어 보이는 그들끼리
흔들리다가 흔들리지 않다가
누구 한번 눈길 보낸 적 없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기대서 있다
가끔 한 번씩
키가 늘어진 오후 햇살의 하품 소리에
듣지 않는 듯 쫑긋
귀를 풀어 놓기도 한다
♧ 경호강 - 도경회
송편처럼 휘어진 진사리 밭
꿈꾸는 아이들은 발꿈치로 고닥을 지으면서
노란 메주콩을 놓고
푸른 완두콩을 넣고
오목오목 빨간 완두콩을 심어요
살진 두렁마다 콩들은 무럭무럭 자라
해질녘 아이를 불러들이던 어머니 남색 적삼처럼
고운 콩꽃이 화사하게 벙글었어요
천둥 번개 다 보내고
콩들이 주렁주렁 풍년 들어
얼씨구 절시구 어깨춤 덩실덩실 추면서
타작을 했어요
윙~타닥! 윙~타닥! 도리깨를 칠 때마다
복된 콩들이 튀어 나왔어요
달개비꽃처럼 부리가 뾰로통해진 주린 배
허기진 영혼
포송포송 살 올려
구름송이로 띄웠어요
♧ 억새와 야고 – 근향
봄눈 녹을 때 싹 틔워 여름 햇살 머금고 세찬 바람 맞서는 억새 날 선 잎사귀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베인다 뿌리에 핀 야고 낮은 눈에만 보인다 하얀 춤을 추는 억새에게 고개 숙인 보랏빛을 선사한다
전쟁 통에 한쪽 팔 잃고 아들 낳으러 들어와 큰댁 담배를 태울 적, 싸리비로 마당을 쓸던 작은댁 영감 먼저 보내고 이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큰댁과 오십 년이다 허전한 팔로 캔 산나물 보따리 한쪽 어깨에 둘러멘 채 머위 한 다발 이천 원에 보낸다 문디 헌 돈 주나 와 내는 새 돈 받으면 안 되나 손에 단돈 몇 푼 쥐고 비쓸비쓸 돌아온다 성님 앞에 내민 박카스 야무지다
그늘에 핀 야고 허허로이 긴 팔 뻗어 새하얀 억새를 끓어안는다
* 월간『우리詩』2019년 9월(통권375호)에서
* 사진 : 9월 17일 동창들과 같이 오른 노고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