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숲에서 본 하늘
♧ 건봉사 - 김귀녀
자작나무 숲이 울창한 금강산 초입
건봉사 입구엔
사명대사의 좌상이
왜적을 물리친 담대한 손으로
최북단 1호절 *건봉사를 지키고 있다
나무와 새들의 속삭임도 보이지 않는
고즈넉한 산사엔
매표소도 없고
개짓는 소리도 없다
다만, 금강저를 쥐고
객들을 맞는 불이문의 장한 모습이
산 빛에 취한 듯
가을 단풍에 마냥 붉다
불이문을 지나 능파교를 건너
대웅전을 오른다
두 개의 돌기둥과 탑비를 지나
아담한 연지 옆으로 적멸보궁을 간다
만해 한용운님의 *사랑하는 까닭을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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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봉사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신안리 금강산에 있는 절
* 한용운의 시 ‘사랑하는 까닭’
♧ 뭉게구름 업은 지프차 - 김금용
뭉게구름을 뒷차창에 업고 달리는 지프차
저 차를 타면 나도 구름 위로 올라갈 수 있겠다
흰 구름 화관을 쓴 만년설산 위까지 거뜬히 올라가
땅값 집값 안내고도 구름판 깔고 집지을 수 있겠다
기둥도 지붕도 문도 필요 없이 널찍하게 펼쳐진 마당에서
양과 토끼, 돌고래, 원숭이구름과 뒹굴며 놀 수 있겠다
새털구름이 6천 미터 설산을 넘다 폭포로 흘러내리면
맑은 정화수 한 사발 나눠 마시고
반달곰 구름에게 내 낭군하자고 졸라도 되겠다
오색 타르초가 휘날리는 돌탑을
나시족 아낙네가 구름을 이고 돌 때
발 빠르게 구름동네에 먼저 도착해도 되겠다
살짝꿍 내가 슬쩍 새치기해도 되겠다
♧ 수목원 예찬 - 김용학
-한밭수목원에서
매일 점심시간에
수목원을 홀로 산책한다
그곳에는
늘 사계절이 존재한다
꽃들의 향연 황홀한 봄
신록의 싱그러운 여름
단풍과 결실 맺는 가을
침묵과 적막 속에 겨울
삶에서도 이 모든
흐름이 너울거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은 인생이라는
모든 과정을 담아낸다
또한 그곳은 최고의 명의이다
마음 비우고, 외로움을 잊게 하고
걷기만 하는데 내 몸은 과수원 가꾸는
풍요로운 농부가 되고 시인이 된다
꽃이여, 나무여!
그대는 나의 벗, 치유의 스승이고
늘 나와 함께하는 애인이다.
♧ 숲속에서 – 김종호
숲 위에 앉은 햇살은
세상을 숲이라 하고
물 위에 앉은 햇살은
세상을 물이라 하네
숲속 소나무에
스치는 바람엔
싱그런 솔향이 나고
계곡 물 위에 스치는
바람엔
슴슴한 물내음 나네
소나무 숲
작은 곳에도 수많은
세상이 나를 바라보네
♧ 낌새 - 진란
나무들의 아미가 붉어졌다
무성하던 수다가 한 입씩 떨어졌다
지난한 폭염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던 수다였다
견딘다는 것은 그다지 웅숭깊은가
바람의 동공은 깊어져 가벼운 수다에도 몸을 날렸다
너에겐 너무 가벼운 잎사귀
점점 어두워지고 더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는 것
한밤중 고양이 울음처럼 무거운 것이다
길고양이 울음을 굴리며 팔랑귀처럼 떠나는
길 위에 서서 스러지고 있을 흐느낌들
우두망찰 그 배후로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떠나는 길 모롱이에서 돌아보면 차마
성글어진 나무들의 아미에 입 맞추지 못하리라
손을 잡고 잠시 온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훗날 좋은 봄볕에 만나면 알아챌 수는 있을까
가까스로 알아채더라도 처음인 척 해야 하는 것일까
가을 숲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밤이다
구절초 향기 수런거리는 시월은 지워지는 중이다
* 시 : <산림문학> 통권35호(2019년 가을호)에서
* 사진 : 오늘(10.16) 낮 한라수목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