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권경업 시인의 가을시편과 단풍

김창집 2019. 10. 28. 08:45


어제는 모처럼 단풍이 보고 싶어

한라산 둘레길 2코스로 삼형제 말젯오름까지

가을 숲길을 걸었습니다.

 

아직은 옅은 빛의 단풍이지만, 너무 고와

수많은 감탄사를 내지르며 셔터를 눌렀습니다.

집에 와 보니, 실력이 아직 모자라서 그런지

생각만큼 붉지 못합니다.

 

이아침, 그래도 고운 것을 몇 장 골라

지금은 잠시 행정가가 되어버린,

낭만의 등산가 친구가 생각나

가을 시를 불러내어 같이 올립니다.

    

 

가을 숙밭재

 

잿마루는 아득했다

푸른 하늘 배경으로 한 자태는 청아했고

나는 늘, 그 너머의 세상 꿈꾸었다

 

삶이 돌아 보이는 가을

다들 서둘러 처음으로 돌아가는 산자락

소슬바람만 일 없이 쏘다니는 자작숲의

마른 등성이에 섰을 때

재 너머의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골골에 여울지는 벽송사 저녁 범종소리

부질없음이라, 부질없음이라 일러도

캄캄한 하늘과 땅 사이

잔별은 무더기로 쏟아졌고

 

그 밤 내내 낡은 등산복 어깨 위

찬 서리 내려앉고

나는 고스란히 네가 되었다

    

 

가을하늘 1

 

쑥밭재 가을 잿마루에 귀를 대면

총총, 떠나보낸 젊은 날이 저만치

아름다운 날들이 저만치

 

조갯골 은빛 물방울로 구르던 사랑아

이제는, 갈꽃 흐드러진 하구(河口) 어디쯤

지친 다리쉼 할 사람아

느릅나무 빈 가지를 흔드는

너의 순결 같은 바람에게서

차마, 차마 나누지 못했던 말들이

파랗게 묻어 나오고

나는 종일 이명(耳鳴)에 귀를 앓는다

    

 

 

투구꽃

 

여린 바람에도 흔들리는 몸

너무 고와서, 두려운

칼로 물 베기

 

그래, 피할 수 없는 게 사랑이라면

어차피 죽고 못 살아도 투구를 쓰자

    

 

! 가련한 나의 청춘아

 

자작숲 푸른 손짓처럼 애타게 불러도

일 없다, 돌아서서

먹장구름 매지구름 천둥번개

억수비 쏟아지던 그 여름 쑥밭재 길을

휘여휘여, 쉼 없이 넘어간 나의 청춘아

꽃 피고 새 우짖는 봄날은

쉬 간다하여 붙잡을 수 없었고

애처롭게, 누렇게 타들어 가는

갈참나무 마른 손짓으로 너를 부른다

한 번도 사랑한다 불러보지 못한

가여운 나의 청춘아

그 흔한 그리움 한번 갖지 못하고

그 많은 기다림 하나 두지 못하고

고갯마루 내려다보이는

백로 추분 한로 상강 그리고 입동이

발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것을

 

더 무엇 주저하겠느냐

어느새 골 깊은 주름 이마에 드리운

랑도 이별도 뜬구름 같았던 나의 청춘아

돗자리 둘둘 말아 옆에 끼고

지리산 국화주 큰 병으로 준비하여

단풍든 개울물 붉게 흘러가는 유평계곡

내 노래에 내가 춤추고 내가 나에게 술잔 권하여

여린 볕, 가을 한나절이라도 취했다 오자

! 나의 가련한 청춘아!

 

  

 

가을에게

 

배경으로 한, 한없이 투명한

너 푸른 빛 때문일까

보이지 않는 발걸음에 내 귀는 시리고

소리 없이 전하는 바람결에

들끓던 가슴은 스산하여

나는 서성인다

 

뜨겁던 여름날, 먼빛으로

너를 예감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준비되어 있지 않은, 이 아침이

그 어느 때보다 막막하여

나는 떨고 있다, 두려움은 아니라 말하지만

흔들리며 가야할 너와의 길이

저 쑥밭재 길섶 억새처럼, 밤마다

하얗게 울음으로 피어날 그 일이 걱정이구나

 

흔히들 쉽게 말하고 쉽게 지워버릴

그 무엇으로는, 정녕

너를 맞지 않으련다

    

 

한로(寒露)

 

세상이 다 애처로운 아침입니다

 

취밭목 길섶 제 혼자서 피어

끝내 한로 찬이슬이라고 우기는

저 가여운 들국화를, 누가

밤새 눈물 머금게 하겠습니까

    


 

잎 지는 날은

 

중봉 오름길 가로막던 주목(朱木)

피어오르지 않는 신밭골 밥 짓는 연기와

대원사 본존불 미소를 머금은 토박이들과

유평리 주막집 늙수그레한 주인 내외와

막걸리같이 구수한 인정과

가랑잎 분교 멎어 버린 풍금소리와

보릿가을 끝난 들녘 이삭 줍던 유년과

세월이 강 되어 간

평촌리 정거장 가겟집 처자 아이와

첫 동정을 받아간

원지 삼거리 니나노집 늙은 작부와

오래 전, 알프스를 넘어 하얀 산이 된 산벗

 

떠나가 멀어진 것 다 그립다    


 

 

가을 하늘 2


너를 만나려면

쑥밭재 잿마루로 가야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하에 묻히는 삶은

신촌, 시청앞, 종로에서 다시 부활하여도

이제는, 너를 만날 수 없어

아득한 쑥밭재 잿마루로 가야한다

 

조개골 거슬러, 시간이 멈추어 서는

상수리숲 언저리 어디쯤

거기 해 뜨고 해 지는 종일

작은 용담꽃 되어 너를 바라보다가

날 저물어, 꼭꼭 품어 두었던 별들이

사랑한다는 말처럼 떠오를 때

내 푸른 꽃잎에도

이슬 같은 눈물은 맺혀

 

직박구리 둥지 떠나고

다들 바삐 떠나가면, 끝내 나도

마른 꽃대궁 남겨두고 떠나겠지만

내 푸르름 다 할 때까지

너만을, 너만을 바라보리라

 

 

         * 권경업 시집꽃을 피운 바람의 독백(도서출판 전망, 201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