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양순진 시집 '노란 환상통'의 시

김창집 2019. 10. 29. 12:29


나미비아 코끼리처럼

 

죽기 전에

나미비아 붉은 사막 갈 수 있을까

 

섭씨 사십 도 더위

죽은 나무 먹으며 늪으로 향하는

코끼리 무리에 끼어

 

살아 있다는 자각 하나로

불가능 사이를

횡단할 수 있다면

 

지금 내게 덮친 절망의 협곡은

먼 꿈의 계단쯤으로 여길 텐데

 

나미비아 붉은 사막

귀 부채로 더위 날리며

죽은 나무 삼킨 배설물로

사막 원숭이 새 살려 내고

피붙이를 이끌고

사막의 끝으로 행렬하는

코끼리처럼

 

혼 바쳐

생의 나미비아를 순례하련다

    

 

 

대가야 토기를 문지르다

 

자주 그릇을 떨어뜨리고

그 조각 모서리에 손이 베인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은 섬찍한 일

그릇이 미끄러져 바닥에서 조각나는 것처럼

파편들이 심장에 박힌다

 

박물관에서 대가야의 방죽을 돌다가

오랜 흙향의 연주를 들었다

대가야의 여인들은

슬픔으로 그릇을 빚었을 것이다

긴목항아리* 표면에

여인네들의 눈물이 엉켜 있다

굽다리접시*의 곡선에

여인네들의 인내가 배어 있다

사라져 버린 슬픈 역사를 꿰뚫어 본다는 것은

그릇을 빚는 일

나는 너를 빚으며 슬픔을 알았다

자주 너를 떨어뜨리고

그 조각 모서리에 심장이 베인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대가야 여인네 심장에 박힌 철흔

헤집는 일처럼 산산조각 나는 일

 

너를 빚는 일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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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의 대표적인 토기명

    


 

 

순천만 갈대

 

비워도 비워도 비워지지 않을 때

순천만으로 떠나라

 

갈대끼리 서로 몸 부비는 소리

새벽을 깨운다

얇디얇은 몸 가느다란 팔

부비는 모든 것은 아마 뼈와 뼈가

부딪히며 내는 절망의 비명인지도 모른다

그 신음소리에 이끌려

빙의된 사람처럼 무진교 지나

오르막 산길 따라 걷다 보면

순천만의 속살 훤히 내다뵈는 전망대에 이른다

 

쉬어도 쉬어도 마음 소란스러울 때

용산 전망대에 오르라

 

갈대의 천국 순천만 하늘 가득 흑두루미 떼 나르고

물 위에선 백조와 오리 유유히 흐르고 있다

농게 칠게 짱뚱어 노니는

일망무제의 갯벌 앞에 서면

누구나 건너온 몇 겹의 생 벗으며

그대로 갈대가 된다

 

걸어온 모든 생의 부스러기는

분홍 노을이 서산 등 뒤로 안고 간다

남은 건

비워지고 비워져서 완전한 갈대의 직립

누가 갈대는 흔들린다고 하나

누가 갈대는 여리다고 하나

갈대는 피도 눈물도 바람에게 맡겨버리고

저는 온전히 하늘과 땅

바다와 사람 잇는 메신저로

군락 이룰 뿐이다

 

곁에 아무도 없고

마음에 섬 하나 없는 고립에 갇힐 때

순천만 갈대의 침묵과 합류하라

 

우리는 모두 갈대다

 

 

                       *양순진 시집노란 환상통(책과 나무,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