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순진 시집 '노란 환상통'의 시
♧ 나미비아 코끼리처럼
죽기 전에
나미비아 붉은 사막 갈 수 있을까
섭씨 사십 도 더위
죽은 나무 먹으며 늪으로 향하는
코끼리 무리에 끼어
살아 있다는 자각 하나로
불가능 사이를
횡단할 수 있다면
지금 내게 덮친 절망의 협곡은
먼 꿈의 계단쯤으로 여길 텐데
나미비아 붉은 사막
귀 부채로 더위 날리며
죽은 나무 삼킨 배설물로
사막 원숭이 새 살려 내고
피붙이를 이끌고
사막의 끝으로 행렬하는
코끼리처럼
나
혼 바쳐
생의 나미비아를 순례하련다
♧ 대가야 토기를 문지르다
자주 그릇을 떨어뜨리고
그 조각 모서리에 손이 베인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은 섬찍한 일
그릇이 미끄러져 바닥에서 조각나는 것처럼
파편들이 심장에 박힌다
박물관에서 대가야의 방죽을 돌다가
오랜 흙향의 연주를 들었다
대가야의 여인들은
슬픔으로 그릇을 빚었을 것이다
긴목항아리* 표면에
여인네들의 눈물이 엉켜 있다
굽다리접시*의 곡선에
여인네들의 인내가 배어 있다
사라져 버린 슬픈 역사를 꿰뚫어 본다는 것은
그릇을 빚는 일
나는 너를 빚으며 슬픔을 알았다
자주 너를 떨어뜨리고
그 조각 모서리에 심장이 베인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대가야 여인네 심장에 박힌 철흔
헤집는 일처럼 산산조각 나는 일
너를 빚는 일이 그러했다
---
*대가야의 대표적인 토기명
♧ 순천만 갈대
비워도 비워도 비워지지 않을 때
순천만으로 떠나라
갈대끼리 서로 몸 부비는 소리
새벽을 깨운다
얇디얇은 몸 가느다란 팔
부비는 모든 것은 아마 뼈와 뼈가
부딪히며 내는 절망의 비명인지도 모른다
그 신음소리에 이끌려
빙의된 사람처럼 무진교 지나
오르막 산길 따라 걷다 보면
순천만의 속살 훤히 내다뵈는 전망대에 이른다
쉬어도 쉬어도 마음 소란스러울 때
용산 전망대에 오르라
갈대의 천국 순천만 하늘 가득 흑두루미 떼 나르고
물 위에선 백조와 오리 유유히 흐르고 있다
농게 칠게 짱뚱어 노니는
일망무제의 갯벌 앞에 서면
누구나 건너온 몇 겹의 생 벗으며
그대로 갈대가 된다
걸어온 모든 생의 부스러기는
분홍 노을이 서산 등 뒤로 안고 간다
남은 건
비워지고 비워져서 완전한 갈대의 직립
누가 갈대는 흔들린다고 하나
누가 갈대는 여리다고 하나
갈대는 피도 눈물도 바람에게 맡겨버리고
저는 온전히 하늘과 땅
바다와 사람 잇는 메신저로
군락 이룰 뿐이다
곁에 아무도 없고
마음에 섬 하나 없는 고립에 갇힐 때
순천만 갈대의 침묵과 합류하라
우리는 모두 갈대다
*양순진 시집『노란 환상통』(책과 나무, 20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