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년 설날 아침에
2020년 새해가 밝고 한 달이 다 지나가지만
정작 설이 지나지 않으니
새해를 맞은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돼지가 귁귁거리며 사라지고
영리한 쥐가 등장하는
경자년 설날 아침에야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드나든 분들께
예쁜 매화로 세배를 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설날 아침에 - 동호 조남명
매년 오는 해를
맞이하지만
새 마음으로 맞아야 하리
무언가 소망을 안고
첫날을 맞이하라
꼭 이뤄야 할 일
마음에 담고 첫 아침을 맞으라
나이 더 늘었으니
그 값을 해야 하고
내 나이 먹는 줄만 알면서
아이들 머리 크는 것 모르면 안 되느니
핏줄들 모여 조상 기리고
둘러앉아 떡국 한 그릇
술 한 잔 나눌 수 있음을
기뻐하고 만족해야 할 일이다
그리 못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갑자 넘도록 새해를 맞지만
덧없는 세월은 흐르는 물 같으니
시간을 가볍게 허비하지 말 일이다
이 땅 어디, 누구에도 축복이 있기를
또, 아침 해에 빌어 보노라.
♧ 설날 - 오세영
새해 첫날은
빈 노트의 안 표지 같은 것,
쓸 말은 많아도
아까워 소중히 접어 둔
여백이다.
가장 순결한 한 음절의 모국어(母國語)를 기다리며
홀로 견디는 그의 고독,
백지는 순수한 까닭에 그 자체로 이미
충만하다.
새해 첫날 새벽
창을 열고 밖을 보아라.
눈에 덮여 하이얀 산과 들,
그리고 물상들의 눈부신
고요는
신(神)의 비어 있는 화폭 같지 않은가.
아직 채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눈길에
문득 모국어로 우짖는
까치 한 마리.
♧ 설날 풍경 - (宵火)고은영
아버지 정갈한 두루마기 앞섶이
유난히 차 보이고
대님 매던 서툰 손놀림에
여명의 장닭소리 아직 생생한데
희망을 두레질하는 차례상에는
언제나 생소한 얼굴들이
낡은 액자에 오랜 고화로 박힌 채
살폿 웃거나 근엄하다
쪽진 머리 저 여인은 고조 할매
흑백의 두루마기 아스름 저 시무룩한 고조 할배
구레나룻 여덟 팔자 유난히 쌔근한
저 남자 우리 할매 멋스러운 지아비
서른한 살 과부든 우리 할매
할배 바라보는 눈매가 붉어 애처롭다
묵시적 가족사
태어나 얼굴 한번 구경 못했다
피붙이라고 살가운 말 한 마디 없었다
어느 시공에도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했고
만날 수 없던 운명 호적에나 묶여 있을까
설날 아침
휘적휘적 저 눈길을 걸어 온 조상들
우리 집 안방에 진귀한 고화 전시에 나란히 앉아
한껏 밝은 얼굴로 따끈한 떡국을 드시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