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우리詩' 2월호의 시와 백동백

김창집 2020. 2. 5. 09:36

 

♧ 홑말[單音節語]의 힘 - 洪海里

 

내 몸은 뼈와 살과 피로 되어 있어 힘을 쓴다

몸에는 눈 코 입 귀 혀 손 발 배 볼 뺨 샅 이 좆

등 털 턱 씹 팔 젖이 있고

쌀과 밀과 콩과 팥을 섞어

불로 밥과 떡을 짓고 묵도 쑤어 먹고

김 굽고 국 끓이고 속을 푸나니

해 바뀔 적마다 달 따라 날 잡아

때를 맞춰 때를 씻고 사는 삶이 있다

벼 심고 나면 파 톳 무쳐 술도 마시고

너와 나 벗이 되어 담에 올라 굿도 하며

해질 때 늪에 나가 딸과 놀을 바라보다

덫을 놓아 덤을 얻는 일도 즐겁지

붓 잡아 글도 쓰니 이만하면 살 만하지 않은가

안이나 밖이나 옷 입고 벗고 춤도 추나니

숨도 못 쉬고 침이나 흘리며 산다면 쓰것는가

칼과 끌과 못으로 집도 짓고 뜰도 만들어

삽으로 땅의 흙을 파 꽃도 길러 꿀도 따고

닭도 키우고 꿩도 길러 알도 먹고 사느니

낫으로 꼴 베는 꼴이 우습다고 놀리지 마라

봄과 갈에 뽕도 따고 임도 보는 날도 있고

뫼에 올라 풀 밟고 감 배 밤도 줍고

절에 가 절도 하고 중 만나 윷도 논다고

재 뿌리지 말거라 욕도 하지 마라

개 소 말을 기르며 가다가 샘에 낯도 비춰 보나니

논과 밭으로 된 들에 나가 낮엔 땀도 흘리고

밤이 오면 곤히 잠을 자니 꿈도 오지 않는가

앞에서 뒤에서 위에서 지저귀는 새도

굴 속의 쥐도 저 좋아 찍찍대게 두고

맘 가는 대로 비오면 쉬고 볕 좋으면 나니

곰과 범과 뱀과 벌을 피하고

길을 따라 뫼에 오르고 내에 나가니

해와 달과 별의 빛과 볕이 없으면 어찌 살 수 있으랴

나에겐 말이 있고 속에 얼을 지녔나니

첨부터 끝까지 곁에 옆에 누가 없다면

우리 밑엔들 뭐가 있기나 하랴

돈 벌고 똥이나 싸며 싸대며 싸우며 산다면

멋이 있겠는가 맛이 있겠는가

오늘은 배 타고 나가 돛을 올리고 닻을 내리면서

멍들어 퍼런 맘도 풀어야지

뻘 속에 게나 돌 속의 내 넋이나 다른 게 뭔가

홀로 내리쏟는 물 그냥 바라다보고 서서

목을 뽑아 고래고래 악을 써 마침내 꾼이 되듯

갓 쓰고 신 신고 줄을 타듯 살 일이로다

얼씨구!

 

 

♧ 위선의 낯가죽 - 김동호

 

21세기 화려한 지구촌

화장 지워지자 민낯 드러난다

 

시기 질투 분노 오기

불안 공포 무기력 좌절 절망…

 

이들을 덮고 있는 僞善의

낯가죽이 비닐가죽이다

 

 

♧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봉산리 268* - 차영호

 

너는

나의 원기소

 

고소한

추억을 돌절구에 빻아 빚은

환丸

 

새물새물

 

오늘도 누르끄름한 알약 한 움큼 움켜쥐고 뒤꼍 노나무 앵두나무 겹쳐진 그늘로 스며드는

불알 두 쪽

 

장닭, 저놈은 왜

바짝 뒤따라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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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개발로 종적 없이 사라진 내 본적지.

 

 

♧ 슬픔이 사는 곳, 심봉사의 뜰 – 정복선

 

여기 웅덩이 여럿 있네

누가 내 뜰에서 어여쁜 옥잠화를 캐 갔나!

웅덩이마다 숨죽인 울음소리

그 중 가장 큰 구렁은

눈 떠도 무명無明을 깨뜨리지 못한 슬픔

밤새도록 장대비 내리고 이 무량한 출렁다리를

혼자서 더듬어 건널 줄이야

너의 숨결 다시 느끼고 싶다

몰록, 자다 깬 듯,

옥잠화를 옥잠화라 알아보고 싶다

 

 

♧ 불의 문장 – 김미외

 

다시 첫 문장 앞에 선다

 

‘사 랑 한 다’

 

바람이 문장의 불씨를 입술에 묻혀 와

 

마른 장작으로 서 있는 내게

 

부빈다

 

불의 경전에 손을 얹고

 

서약한다

 

“다시 재가 되겠습니다”

 

 

                                                  *월간『우리詩』2020년 02월 380호에서

                                                                        *사진 백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