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 2월호의 시와 백동백
♧ 홑말[單音節語]의 힘 - 洪海里
내 몸은 뼈와 살과 피로 되어 있어 힘을 쓴다
몸에는 눈 코 입 귀 혀 손 발 배 볼 뺨 샅 이 좆
등 털 턱 씹 팔 젖이 있고
쌀과 밀과 콩과 팥을 섞어
불로 밥과 떡을 짓고 묵도 쑤어 먹고
김 굽고 국 끓이고 속을 푸나니
해 바뀔 적마다 달 따라 날 잡아
때를 맞춰 때를 씻고 사는 삶이 있다
벼 심고 나면 파 톳 무쳐 술도 마시고
너와 나 벗이 되어 담에 올라 굿도 하며
해질 때 늪에 나가 딸과 놀을 바라보다
덫을 놓아 덤을 얻는 일도 즐겁지
붓 잡아 글도 쓰니 이만하면 살 만하지 않은가
안이나 밖이나 옷 입고 벗고 춤도 추나니
숨도 못 쉬고 침이나 흘리며 산다면 쓰것는가
칼과 끌과 못으로 집도 짓고 뜰도 만들어
삽으로 땅의 흙을 파 꽃도 길러 꿀도 따고
닭도 키우고 꿩도 길러 알도 먹고 사느니
낫으로 꼴 베는 꼴이 우습다고 놀리지 마라
봄과 갈에 뽕도 따고 임도 보는 날도 있고
뫼에 올라 풀 밟고 감 배 밤도 줍고
절에 가 절도 하고 중 만나 윷도 논다고
재 뿌리지 말거라 욕도 하지 마라
개 소 말을 기르며 가다가 샘에 낯도 비춰 보나니
논과 밭으로 된 들에 나가 낮엔 땀도 흘리고
밤이 오면 곤히 잠을 자니 꿈도 오지 않는가
앞에서 뒤에서 위에서 지저귀는 새도
굴 속의 쥐도 저 좋아 찍찍대게 두고
맘 가는 대로 비오면 쉬고 볕 좋으면 나니
곰과 범과 뱀과 벌을 피하고
길을 따라 뫼에 오르고 내에 나가니
해와 달과 별의 빛과 볕이 없으면 어찌 살 수 있으랴
나에겐 말이 있고 속에 얼을 지녔나니
첨부터 끝까지 곁에 옆에 누가 없다면
우리 밑엔들 뭐가 있기나 하랴
돈 벌고 똥이나 싸며 싸대며 싸우며 산다면
멋이 있겠는가 맛이 있겠는가
오늘은 배 타고 나가 돛을 올리고 닻을 내리면서
멍들어 퍼런 맘도 풀어야지
뻘 속에 게나 돌 속의 내 넋이나 다른 게 뭔가
홀로 내리쏟는 물 그냥 바라다보고 서서
목을 뽑아 고래고래 악을 써 마침내 꾼이 되듯
갓 쓰고 신 신고 줄을 타듯 살 일이로다
얼씨구!
♧ 위선의 낯가죽 - 김동호
21세기 화려한 지구촌
화장 지워지자 민낯 드러난다
시기 질투 분노 오기
불안 공포 무기력 좌절 절망…
이들을 덮고 있는 僞善의
낯가죽이 비닐가죽이다
♧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봉산리 268* - 차영호
너는
나의 원기소
고소한
추억을 돌절구에 빻아 빚은
환丸
새물새물
오늘도 누르끄름한 알약 한 움큼 움켜쥐고 뒤꼍 노나무 앵두나무 겹쳐진 그늘로 스며드는
불알 두 쪽
장닭, 저놈은 왜
바짝 뒤따라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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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개발로 종적 없이 사라진 내 본적지.
♧ 슬픔이 사는 곳, 심봉사의 뜰 – 정복선
여기 웅덩이 여럿 있네
누가 내 뜰에서 어여쁜 옥잠화를 캐 갔나!
웅덩이마다 숨죽인 울음소리
그 중 가장 큰 구렁은
눈 떠도 무명無明을 깨뜨리지 못한 슬픔
밤새도록 장대비 내리고 이 무량한 출렁다리를
혼자서 더듬어 건널 줄이야
너의 숨결 다시 느끼고 싶다
몰록, 자다 깬 듯,
옥잠화를 옥잠화라 알아보고 싶다
♧ 불의 문장 – 김미외
다시 첫 문장 앞에 선다
‘사 랑 한 다’
바람이 문장의 불씨를 입술에 묻혀 와
마른 장작으로 서 있는 내게
부빈다
불의 경전에 손을 얹고
서약한다
“다시 재가 되겠습니다”
*월간『우리詩』2020년 02월 380호에서
*사진 백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