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홍해리 시 '배꽃' 외 3편

김창집 2020. 3. 26. 12:15

 

♧ 배꽃 - 홍해리

 

1

 

바람에 베어지는 달빛의 심장

잡티 하나 없는 하얀 불꽃이네

호르르 호르르 찰싹이는 은하의 물결.

 

2

 

천사들이 살풀이를 추고 있다

춤 끝나고 돌아서서 눈물질 때

폭탄처럼 떨어지는 꽃이파리

그 자리마다 그늘이 파여……

 

3

 

고요가 겨냥하는 만남을 위하여

배꽃과 배꽃 사이 천사의 눈짓이 이어지고

꽃잎들이 지상을 하얗게 포옹하고 있다

사형집행장의 눈물일지도 몰라.

 

4

 

배와 꽃 사이를 시간이 채우고 있어

배꽃은 하나지만 둘이다

나와 내가 하나이면서 둘이듯이

시간은 존재 사이에 그렇게 스민다.

 

                                     * 꽃시집『금강초롱』(우리詩 시인선 036, 2013)

 

 

♧ 배꽃 - 홍해리(洪海里)

 

봄에 오는 눈발은

밤에 더 밝다

 

나뭇가지 사이로

나는 나비 떼

 

새들도 날아와

우짖으면

 

달빛에 노 젓는 소리

하얗게 일어서고

 

깊은 산

시름 속에 젖는 한밤을

 

옷깃에 차는

달빛 그림자

 

눈썹 끝에 어리는

천상의 엽서.

 

                                                      *시집 『투망도』, (선명문화사, 1969)

 

 

♧ 꽃에게

 

아프다는 말 하지 마라.

 

그 말 들으면,

 

나도 아파 눈물이 진다.

 

                                             * 시집『비밀』(우리글 대표 시선 17, 2010)

 

 

♧ 봄, 벼락치다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 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 시집『봄, 벼락치다』(우리글, 2006)